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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8월 4일 본문
0.
"────"
입이 멋대로 움직여 주문을 말하더니, 손에서 날카로운 얼음의 창이 발사된다.
얼음의 창은 빠른 속도로 날아가서 눈 앞의 흐느적거리는 부정형의 생물체에게 명중한다. 미끄덩한 질감의 생물체는 쩌적- 하는 소리와 함께 얼어버리더니 이내 터져버린다.
선두에 있던 생물체가 처참하게 터졌으니 뒤를 따라오는 녀석들이 조금 움츠러들만도 한데, 정해진대로 움직이는 몹답게 꾸역꾸역 몰려들어와 어떻게든 나를 덮치려고 발악을 한다.
언데드 계열의 몬스터보단 훨씬 나은 편이지만, 이 슬라임 형태의 생물도 보고 있으면 불쾌한 기분이 자꾸자꾸 높아져, 정신적인 피로감이 상당했다.
근처의 대상을 감싸안아 체액으로 녹인다는 공격 방법도 굉장히 기분 나뻤기에 나는 되도록이면 맞지 않고 싸우고 싶었지만, 실제로는 두어대 정도는 맞을 수밖에 없었다. 내 몸이 실제로 녹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화상을 입은 것처럼 엄청나게 아팠다.
HP가 얼마나 깎였는지는 몰라도, 두어대 가량을 연속으로 맞고 난 뒤로 거리 조절을 유심히 하는 걸로 보아 꽤 많이 깎인 것 같았다. 아직 포션을 마시지는 않았지만.
다시 입이 움직여 주문을 말하자, 꾸역꾸역 몰려오는 녀석들 앞에 얼음으로 된 벽이 생겼다. 이걸로 시간을 벌고 광역마법을 준비하는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얼음장벽이 깨지고 있는 동안, 나는 손을 뻗고 무어라고 중얼거리더니, 이내 손에서 거대한 얼음구가 생겼다. 내 상반신을 가리고 남을만큼 커다란 얼음구는 얼음장벽도 깨부수고 둔중하게 날아가더니, 그 자리에서 터지면서 작은 얼음조각들을 무수히 뿌리고, 얼리고, 터쳤다.
십여마리가 꾸물대며 몰려있던 장소에 얼음구가 터지고 나니, 남은 건 시체의 잔해들뿐. 나는 허리춤에 달려있는 주머니에서 마나 포션을 하나 꺼내서 마시더니, 몬스터가 뿌려놓은 아이템을 하나씩 주워서 주머니에 넣었다.
주머니는 어른 주먹 두 개 정도의 크기였지만, 길다란 창이든 검이든 일단 입구에만 들어가면 전부 들어갔다. 실상은 아이템을 줏었을 때 인벤토리로 들어가는 거겠지만, 내가 보기엔 이렇게 표시되고 있다.
아이템을 전부 수거한 뒤, 나는 그 자리에 미동도 않고 서 있었다.
혹시나 싶어서 몸에 힘을 주어봤지만, 여전히 몸은 전혀 움직이질 않았다. 아직 로그인한 상태라는 것이다.
벌써 16시간 정도를 쉬지않고 사냥을 해왔기 때문에 몸의 피로는 말할 것도 없고, 정신적인 소모가 굉장했다. 몬스터를 상대할 때마다 그 기괴한 몰골을 봐야하는 건 물론, 상처입을 까봐 걱정해야 하고, 혹시나 죽을까봐 노심초사하는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던 것이다.
이 게임은 죽었을 때의 페널티가 굉장히 크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움직이긴 하겠지만, 게임은 언제 어떻게 진행될지 모른다. 그런 점에서 내가 몬스터와 거리를 두고 싸우는 마법사라는 점은 불행 중 다행이지만, 체력이 굉장히 낮기 때문에 자칫 마법을 실수하면 그건 그대로 끝. THE END다.
게임 캐릭터야 죽어도 다시 되살아나겠지만…… 그 안에 있는 나까지 되살아날지는 의문이고, 시험해볼 용기도 없다.
16시간동안 내리 게임을 하는 폐인답게 조작은 능숙한 것 같아 다행이었지만, 결코 죽지 않고 플레이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기에 하루빨리 현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생각해내야 했다.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나는 5분 정도 더 가만히 있다가, 마을로 향했다. 드디어 고난의 행군이 끝난다는 생각에 나는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실제로 나오진 않겠지만.
마을 중심에 위치한 여관에 들어가 숙박 비용을 지불하고, 방으로 들어가 약 5분 뒤.
몸 안을 지배하고 있던 모종의 기운이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후-"
절로 한숨이 나왔다.
온 몸이 다 지끈거리고, 머릿속은 뒤죽박죽이었지만, 드디어 나를 움직일 수 있는 시간이 온 것이다. 지금 당장이라도 쓰러져서 자고 싶었지만,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시간은 한정되어있다. 수면따위로 낭비할 시간은 없다.
우선은 상황 인식이다.
지금 나는 게임 '미스틸테인'에서 내가 키우던 캐릭터인 '트라하'라는 마법사의 몸에 들어와있다. 미스틸테인은 흔해빠진 온라인 게임중 하나로, 다소 높은 자유도를 빼면 어디에나 있는 게임이다.
OBT부터 시작해서 2년간 열심히 즐겨왔던 나는 최근에 게임을 접게 되면서 계정거래를 했다. 이 게임은 1인 1계정이기 때문에, 서브 캐릭터를 두기 위한 계정 거래가 활발한데다 2년간 꾸준히 해온 내 캐릭터는 게임 내에서 그 나름대로의 위치를 가졌기 때문에 꽤나 높은 가격에 거래가 됐다.
내 계정을 산건 의외로 앳된 목소리가 남아있는 여자애였다. '시스'라는 닉네임을 쓰고 있었는데, 여자애가 계정을 산다고 하길래 다소 불안한 마음으로 거래를 했지만, 무사히 거래는 마쳤고, 내 손에는 꽤나 많은 돈이 들어오게 됐다. 목소리로는 많아봐야 고등학생일터인 그녀가 이런 돈을 어디서 구했을까, 라는 생각이 잠깐 스쳤던 기억이 난다.
아무튼 그렇게 거래를 마치고 친구를 불러서 술을 왕창 마시고 집에 돌아와 잠을 청했는데, 눈을 떠보니 이 상황이다.
눈을 떠보니 모르는 장소. 어딘가 부자연스러운 몸.
워낙 그런 류의 소설이나 게임을 많이해서 그런지 직감적으로 원래 살던 세계가 아니라는 걸 깨달은 나는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고, 내가 키우던 '트라하'라는 캐릭터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안 뒤는 입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그러나 기쁨은 잠시. 판타지 세계에서 마음껏 놀아볼 생각으로 이것저것 실험하려던 찰나에, 몸에 힘이 들어가질 않고, 대신 이상한 기운이 몸을 잠식했다.
그리고는 멋대로 여관을 나가고, 이리저리 도구점을 돌아다니고, 마을 훈련장에서 마법을 써보더니, 밖으로 나가 자그마치 16시간이나 사냥에 몰두한 것이다.
몸이 멋대로 움직이는 상황에 당황했지만, 나는 중간부터 이게 다른 누군가가 로그인을 해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현재 계정 주인은 시스였으므로, 그녀가 지금 나를 움직이고 있는 게 확실했다.
다른 사람이 내 몸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미 꿈꾸던 판타지 라이프는 박살이 났지만, 끌려다니면서 알게된 점은 더욱 나를 절망하게 만들었다.
이 세상은 정말로 게임이었다.
새삼스럽게 무슨 소리냐고 그러겠지만, 보통 게임 속 세계로 이동하거나 하면, 매우 비슷하지만 다른 세계라는 설정이 따라붙어서 NPC도 정말 사람처럼 움직이고, 세세한 설정들도 달라지고 하는 법이지만, 이 세계는 그렇지 않은지 재현도 100% 게임 그대로였다.
도구점에 들렀을 때, 나는 무언가 오가는 말을 기대했지만, 그런 건 전혀 없었고 서로 침묵한 채로 쳐다보고나니 쇼핑이 끝나있었다. 다른 NPC도 마찬가지로, 모니터 화면에 떴을 NPC의 대사를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이외에도 스테이터스 창이니 인벤토리는 물론, 하다못해 HP바도 볼 수가 없었다.
심각한 상태.
--
신리가 집에 눌러앉겠다고 선언한 다음 날.
이번 주 내내 복잡한 일이 연달아 있었기에, 돌아온 주말은 굉장히 반가웠다.
나는 아침 일찍 공부를 봐주고 있는 학생의 과외를 끝내고 와서 느긋하게 집에서 공부를 하거나 책을 읽으면서 보내기로 했다.
신리는 임시로 마련한 빈 방에서 하루 종일 뒹굴거리면서 보내다가 오후 늦게서야 일어났다.
나는 신리의 행동에 크게 상관하지 않은 채 하루를 보냈고, 신리는 그 모습을 옆에서 조용히 지켜보기만 했다.
그리고 저녁.
"언제나 그런 식으로 생활하는 거야?"
신리가 말했다.
조금 질린 눈치였다.
"그런 식이라니?"
"하루종일 집에 틀어박혀서 공부하거나 책을 읽는 거 말이야. 오늘은 날씨도 좋았는데."
"나가서 사람이라도 만나야 된다는 소리야?"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신리가 말꼬리를 흐렸다.
신리의 말대로 오늘 날씨는 근래에 보기 드물게 굉장히 좋았지만, 특별히 만날 사람도 없었고, 이번 주는 너무 일이 많았기에 집에서 조금 쉬고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나가서 뭔가를 하는 걸 좋아하는 체질이 아니다.
학교 친구들을 제외하면 기껏해야 여자애들 관련으로 윤이나 만나는 정도인가. 그나마 그것도 자주 있진 않다.
"그런 식이니까 여자애들을 뺏기는 거야. 좀 더 이렇게, 좀, 있잖아?"
어딘가 답답한 투로 말하는 신리.
어쩌란 건지 모르겠다.
"몇 번이나 말하게 하지 마. 뺏기는 게 아니라, 내가 윤에게 부탁하는 거야."
"하아. 어쨌든 넌 좀 액티브하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 날씨도 좋았는데, 날 데리고 나가서 노는 정도는 해줘야지."
"오후 늦게 일어난 녀석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 그렇긴 하지만……. 쓸데없이 이불이 너무 부드러워서 일어날 수가 없었어……."
평범한 이불이었는데.
평소엔 뭘 썼길래. 골판지?
강 둔치에서 골판지를 덮고 오들오들 떨면서 자는 신리의 모습을 떠올려봤다.
"아, 어쩐지 측은한 눈으로 보고 있는데. 혹시나 싶어서 말해두는데, 난 여기 오기까지 별로 잔 적이 없어서 그런 것뿐이니까."
"그러고보니, 그걸 물어보려고 했었는데. 너 대체 정체가 뭐야? 소환된 여자애들하고는 좀 다른 것 같은데."
내 말에 신리는 조금 생각하는 표정을 짓더니,
"가장 확실하고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는 말로는, 음, 신이네. 이 구역의 신."
"……."
"그런 눈초리로 보지 말아줬으면 해. 뭐, 신이라기 보단 공무원? 그런 느낌인가?"
"무슨 일을 하는데?"
"여러가지 있지만, 가장 큰 건 내가 관리하는 이 토지의 이상을 해결하는 일. 요 근래 들어서 가장 이상한 일이 너희 집이었으니 이리 찾아온 거야. 다른 일이 많아서 잠깐 관망했었는데, 슬슬 개입해볼까? 하는 느낌으로 온 거지."
"흐음."
조금 믿기 힘든 얘기였다.
신리의 말을 머릿속에서 굴리고 있자니, 신리가 그런 나를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사실을 말하자면, 니 행동이 마음에 안들어서 찾아온 거야. 이 둔팅아!"
"뭐? 내가 뭘?"
"몰라서 물어?"
"……아니, 뭔 얘긴지는 알겠지만. 이 얘기는 잠깐 제쳐두고, 넌 어디서 찾아왔다는 거야? 천계같은 게 존재하는 건가?"
"그렇다기보단, 토지를 잘 감시할 수 있는 이공간이라고 해야하나. 아무 것도 없는 공간에 망원경이 있어서 그걸로 자기가 관리하는 토지를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겠지? 거기에 책상을 하나 두고 쓸데없는 서류들을 늘리면 내가 있었던 공간이야. 일이 많아서 잘 시간은 커녕 가만히 앉아있을 시간도 없었다고. 그러니까 내가 늦잠잔 건 어쩔 수 없었다는 얘기."
"아니, 그런 건 아무래도 좋은데. 넌 지금 일을 내팽겨치고 우리 집에 왔다는 소리잖아, 그럼?"
"뭐, 그렇게 되나. 그래도 부하직원 같은 애한테 맡겨두고 있긴 하니까 한동안은 괜찮을 거야. 토지의 이상이라면 여기서 해결하는 것도 가능하고."
신리는 여유작작한 태도였지만, 충분히 수상쩍은 얘기였다.
갑자기 집에서 나타난 시점에서 평범하지는 않다고 예상은 가능했지만, 설마하니 신 운운 할 줄이야.
"내 신상 같은 거야 언제든지 말해줄 수 있잖아. 그보다 네 문제를 좀 해결해야겠어. 그 윤이라는 놈과 만날 수는 없는 거야?"
"너, 말하는 게 난폭한데."
"당연하지. 얘기만 들어선 별로 좋은 감정을 가질 수가 없어. 일단 직접 좀 보고싶은데."
"갑자기 그렇게 만나는 건 무리겠지. 미리 연락을 하고……."
"그럼 해."
신리가 단호하게 그렇게 말했다.
나는 한숨을 쉬고 윤에게 전화를 해서,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약속을 잡았다.
*
일요일인 다음 날.
신리와 함께 윤을 찾아가기로 약속한 날이다. 윤에게는 미리 연락을 해두었다.
윤의 집은 여기서 버스를 타고 10분 정도 되는 거리지만, 모처럼의 외출이고, 또 신리의 요청도 있었기에 조금 걷기로 했다.
우리는 간단히 점심을 먹고 2시쯤 집을 나섰다.
"윤이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야?"
신리가 그렇게 물었다.
"알고 있는 거 아니었어?"
"잘 몰라. 너한테서 여자애들을 받아가는 사람이 그 윤이라는 것 정도밖에."
받아간다는 말은 조금 거슬렸지만, 맞는 얘기였기에 나는 별다른 얘기를 하지 않았다.
"성실하고 상냥한 녀석이야. 오지랖이 너무 넓어서 탈이지만, 덕분에 내가 도움을 많이 받는 중이고."
"주로 여자애를 떠넘기면서 말이지."
"말에 가시가 너무 돋아있는 것 같은데."
"전에도 말했지만 네 행동이 그리 유쾌하진 않아."
그래서 신리는 직접 나를 찾아왔다고 했었다.
"그 아이들의 문제를 조금 더 잘 해결할 수 있는 사람한테 보낸 것 뿐이야."
"그래도 널 찾아온 거잖아?"
"'날' 찾아온 게 아니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계약자를 찾아온 거겠지. 그리고 난 그럴 능력이 못 돼."
실제로 윤은 평균적으로 2주일 정도면 그녀들의 문제를 대부분 해결하는 것 같았다. 문제는 다종다양하지만, 그 어느 것이든 윤은 확실하게 해결했다. 지금 윤네 집에서 윤과 같이 살고 있는 애들은 대부분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고, 그저 윤이 좋아서 남아있는 애들이다.
외부에서 보자면 미소녀 여러 명과 동거하는 셈이니 부러울 수도 있겠지만, 윤이 그런 상황을 거저 얻은 건 아니다.
"능력이 없다는 말은 거짓말이야."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너한테 능력이 아예 없다면 그 집에 그런 구조가 생길 수가 없어."
"구조? 한 달에 한 번씩 미소녀가 집에 소환되는 그런 걸 말하는 건가 설마."
신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원인은 모르겠지만, 그 집에 그런 성향이 강한 건 사실이야. 네 말마따나 그녀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소환된거라면, 아무런 능력도 없는 네가 살고 있는 집에 소환될 이유가 없잖아."
그건 그렇다. 하지만…….
"넌 이 구역 신이라며? 그런 구조도 네가 만든 거 아냐?"
내 말에 신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설마. 내가 인과에 조금 정도는 손을 댈 수 있는 능력을 가졌지만, 그런 거창한 일까지는 못 해. 지금이야 내가 그 집에 있으니까 잠시 흐름을 분산시켰지만, 그것도 금방 원래대로 돌아올 거야."
"아예 없애는 방법은?"
"통상적으로는 없지만, 해결책은 3개정도 있어."
"뭔데?"
"하나. 네 집이 그렇게 된 원인을 찾으면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몰라."
신리가 손가락을 꼽으면서 말했다.
"원인을 모른다며?"
"알아내야지. 하지만 힘들 거야."
"다음은?"
"둘. 내가 거기에 영원히 눌러 앉으면서 매번 흐름을 분산시킨다."
그런 게 가능할까.
신리 자신이 말했으니 가능은 하겠지만, 해결책으로는 그다지 좋은 방법은 아닌 것 같았다.
"…뭐야, 불만이야?"
"늑대를 몰아내려고 호랑이를 데려오는 거랑 마찬가지 같은데."
내 말에 신리가 불만스런 표정을 지었다.
"적어도 난 너한테 뭔가를 해결해달라고 부탁하진 않잖아. 귀찮게도 안하고."
"그건 맞아.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그런데도 싫어?'
신리가 싫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신리 개인의 문제보다는, 이렇게 영문 모를 소녀와 같이 산다는 상황 자체가 문제였다.
그 동거하는 소녀가 신리든, 소환된 소녀든, 어느 쪽이든 불편한 건 사실이다.
그 상황만이라면 싫다.
"그에 대한 대답은 뒤로 미룰게."
"치사하긴."
"세 번 째 방법은 뭐야?"
멀리 윤의 집이 보이는 걸 확인하고 나는 말했다.
신리는 별다른 표정변화 없이 담담하게,
"그냥 받아들이는 것."
이렇게 말했다.
"결국 해결책은 하나뿐이라는 소리네."
"아니, 마지막 것도 충분히 해결책이야. 네가 마음을 바꾸고 오는 소녀를 전부 받아들이면 만사 OK잖아?"
"전혀 아니야."
"그럼 윤이라는 녀석한테 다 넘기든지."
흥, 하고 보란듯이 내뱉은 신리는 '저게 그녀석 집이지?'라고 말하며 척척 걸어갔다.
윤하고 말할 때도 저런 태도를 보이면 내 쪽이 곤란하다.
어떻게 잘 달래는 수밖에.
집에는 윤과 함께 항상 붙어다니는 메이드 소녀를 제외한 다른 소녀들은 없었다.
자주 찾아오지는 않았지만, 올 때마다 항상 북적대던 집이었지만, 오늘만큼은 조용했다.
"다들 어디갔어?"
"일이 좀 있어서 내보냈어요. 그리고 괜히 집에 있으면 이야기하는데 방해도 될 것 같아서, 겸사겸사."
"흥, 쓸데없는 참견은."
신리가 온 몸에서 불만을 표출하며 말했다.
이럴지도 모르겠다고 예상은 했었지만, 정말로 이런 태도라니.
윤에게는 어제 전화하면서 자초지종을 설명해놨기 때문에, 신리의 이런 태도에도 쓴웃음만 지을뿐 불쾌해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미안해, 이런 애라서."
"아뇨, 괜찮아요. 그보다 오늘은 무슨 이야기를……?"
"신리가 너를 만나보고 싶다해서."
그렇게 말하며 신리를 보니, 이미 윤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인상을 찌푸리더니,
"……겉보기엔 평범해 보이는데."
"그런가요? 실제로도 평범해요."
"하, 농담도. 평범한 녀석이 여자애들을 그렇게 후리고 다니진 않지."
"하하, 그건 과분하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
신리의 노골적인 도발에도 윤은 차분하게 대응하고 있다.
역시, 폼으로 소녀 여러 명을 구한 건 아니다.
"소환현상에 관해 조사하는 중이야. 신리는 이 구역의 관리자 같은 애고."
"그렇군요."
"내가 이런 말 하기는 그렇지만, 뭔가 짐작가는 게 있으면 알려주면 고맙겠어."
내 말에 윤은 조금 생각하는 포즈를 취하더니,
"별다른 건 없네요. 사실 저도 소환현상에 대해 고민해본적이 없는터라."
"흥, 여자애 생각만 해서 그런 거겠지."
신리가 한껏 비아냥댔지만, 윤은 웃으면서 고개만 끄덕였다.
슬슬 주의를 줄까 생각하고 있는데, 메이드 소녀가 차를 내왔다.
별다른 말 없이 묵묵히 차와 과자를 내려놓다가, 찌를듯한 시선으로 신리를 노려보더니 이내 윤의 뒤로 돌아가 무표정하게 자리잡는다.
다과를 준비하면서 대화가 들린걸까.
문득 신리를 보니 뚱한 표정으로 메이드 소녀를 노려보고 있다.
"나도 진지하게 고민한 적은 없지만, 되도록 이번에는 해결하고 싶어. 너한테도 폐끼치는 것도 있고."
"제가 좋아서 하는건데요, 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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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의 전학생이 온 당일, 방과 후.
나는 학교 근처의 카페에서 여자애와 만나고 있었다.
글로 써놓으면 달달하기 이를데가 없는 상황이었지만, 아쉽게도 그리 좋기만 한 상황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이 자리는 내 자의로 만들어진 자리가 아니다.
평범하게 하교하고 있는 나를 치직- 불길한 소리를 내뿜는 거무튀튀한 물체로 협박해서 이리로 오게 만든 것이다.
단정한 얼굴의 소녀가 전기충격기를 들이밀며, '저기…… 조금 드릴 말씀이 있는데, 따라와 주시겠어요?'라고 말하는 모습은 트라우마가 되기 충분할 정도로 파괴력이 있었다.
"그래서? 사람을 납치해서는 뭘 시키려고?"
"납치라뇨, 그런 건 아닌데요."
침착한 어조로 내 눈 앞의 소녀가 말한다.
우리 학교의 교복을 입고 있었지만, 지나가면서도 본 적이 없는 얼굴이었다.
비율이 잘 잡힌 얼굴로 단정한 생김새였기 때문에, 마주치면 한 번은 돌아볼 법 한 용모였지만, 기억에 없는 걸 보면 교실 밖으로 나다니지 않는 타입이거나, 혹은,
오늘 전학 온 학생이거나, 겠지.
"갑작스럽게 모셔와서 조금 당황하겠지만,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을 잘 들어주세요. 아, 그 전에 하윤의 제일 친한 친구분인 한서림 씨 맞으시죠?"
"갑자기 납치해놓고선 거기부터 물어보기냐……. 맞아. 제일 친한 친구인지 어떤진 모르겠지만."
"죄송해요. 정보가 조금 부족해서……."
"정보?"
"뭐, 그건 나중에 설명해드릴테니……. 그럼 두 번째 질문인데, 최근 하윤의 근처에서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지 않나요? 당신이 느끼긴 어떤가요?"
소녀는 아무래도 윤에게 관심이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주문한 아이스티를 홀짝이며, 윤에 대해 생각했다.
이상한 일……이라고 단정지어 생각하긴 힘들지만, 윤이 근래에 평소답지 않은 행동을 했던 건 사실이다. 지각을 하거나, 안절부절 못하며 수업을 제대로 듣지 않는다거나, 학교가 끝나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에 돌아간다거나, 등등. 전부 평소와는 상반되는 모습이다.
그리고 어제 일어난 폭발에 대해서도 뭔가 숨기고 있는 것 같았다. 그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을 때 의도적으로 화제를 다른 걸로 돌리기도 했었고. 그리고 결정적으로, 오늘 전학 온 전학생 2명이다.
사람같지 않은 외모로 오자마자 전교생의 주목을 받은 그런 미소녀들이 두 명이나 우리 반에 전학을 온 것도 충분히 수상한데, 그 두 명이 모두 윤을 알고 있다는 사실, 게다가 호감까지 품고 있는 것 같은 태도를 취한다는 건 정말로 이상하다.
윤이 그런 여자애들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그렇게까지 친해 보이는 여자애들을 내가 오늘 처음 봤다는 게 이상한 것이다. 조금 지나친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하면서도 쉬는 시간을 이용해 윤의 여동생-연이라고 한다-에게 전학생에 대해서 문자로 물어보니, 자기는 모르는 일이라고 답장이 왔었다. 내가 모르는 건 그렇다치고, 오빠를 너무 좋아해서 조금 걱정이 되는 윤의 여동생도 모르는 일이라고 한다면, 오래된 사이가 아니라 극히 최근에 만난 사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바로 지금.
설마하니 생면부지의 소녀에게 전기 충격기로 협박을 당해서 윤에 대해 질문을 받는다는 바로 이 상황.
이 상황 자체가 윤의 주변에서 무언가 사건이 일어나고 있다는 강한 증거가 되고 있었다.
"……흠."
"저기, 어떤가요?"
내가 팔짱을 끼고 뜸을 들이자 소녀는 조바심이 났는지, 재차 되물었다.
……여기서 예의 전기 충격기를 꺼내면 나는 어쩔 도리가 없었지만, 그걸 쓰지 않는 걸 보아하니 근본부터 나쁜 녀석은 아닌 것 같았다. 속단하긴 이르지만.
우선은 상대에 대한 것부터 알아내야겠지.
"마음에 집히는게 없는 건 아니지만, 그런 걸 왜 알려고 하는데?"
"그건……."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한테 휙휙 친구에 대한 걸 알려줄 순 없잖아? 그렇지?"
"그, 건……, 네. 그렇,겠죠."
탐탁치 않은 어조로 소녀가 말했다.
그러다가 내 얼굴을 보고 한숨을 푹 쉬더니, 자세를 바로 하고는,
"……어차피 협력을 구할 상대니까, 먼저 말씀드리는 것도 좋을 것 같네요. 저…… 아니, 저희는 이런 사람들입니다."
소녀가 교복 품 속에서 둔탁해 보이는 수첩을 꺼내더니 펼쳐 보여줬다.
"재해관리기구 동아시아 지부 정보/탐색 부서 3급 요원 신리………… 무슨 농담이야, 이건?"
"농담이 아니에요. 실제로 존재하는 범세계기구입니다. 저는 여기 쓰인대로 그 기구의 3급 요원이고요. 신리라고 불러주세요."
소녀─ 신리는 한 없이 진지한 태도로 그렇게 말했다.
애초에──
재해대책기구라니. 너무 광범위해서 현실성이 없다. 재해라고 한다면, 보통은 지진이나 화산, 쓰나미 같은 자연 재해를 말하는 것일텐데……, 그런 기구에 요원이 필요할 리가 없지.
내 그런 생각이 얼굴에 나타났는지, 신리는 피식 웃으면서,
"여기에 이 '재해'라는 건 일반적인 자연 재해가 아닌 법칙과 이론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초상현상과 같은 것들로 인한 재해에요. 멀리 갈 것 없이 어제 밤 이 도시에서 일어난 폭발도 그런 재해의 일종입니다. 우리들은 그런 것들을 막을 수 있다면 막고, 막을 수 없다면 존재를 은폐하는 역할이에요."
"……여전히 믿기 힘들지만, 뭐, 좋아. 그런 게 있다고 치고, 네가 그런 기구의 요원이라면, 왜 나한테 윤에 대해 물어보는 거야? 윤이 그런 재해를 발생시키기라도 하는 거야?"
"네, 맞아요."
신리가 주저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부근에선 최초로 확인된 재해 발생 요인이 바로 하윤이에요. 어제의 그 폭발은 하윤과 같이 있던 사람이 저지른 일이고요."
"같이 있던 사람이라니…… 설마, 그 전학생?"
"아마도요."
"겉보기에는 평범해 보였는데, 무슨 이능력이라도 쓰는건가?"
내 말에 신리는 고개를 조금 갸웃하더니,
"정확하게 관측된 바는 없지만, 그럴 거라고 예상하고 있어요. 산이 깎인 거 보셨죠? 폭탄을 터친게 아니라면, 개인이 저런 짓을 하려면 말 그대로 이능력이라도 있지 않는 한 불가능해요."
"그거야 그렇겠지만……."
아무래도 바로 믿기는 힘든 게 사실이다.
가능하면 증거를 보여달라고 하고 싶지만, 지금 바로 보여줄 수는 없을테지.
그보다 지금은 정보를 최대한 많이 얻는 게 중요하다.
"그래서 너희는 윤이 그런 일이 일어난 원인이라고 생각한다는 거지?"
"굳이 말하자면 그렇게 되겠네요. 정확히는 윤과 엮인 인물들이 문제지만요."
"그럼 윤과 직접 교섭하면 되잖아? 적당히 좀 하라고. 왜 굳이 나한테 부탁하는 건데?"
"아, 그건 매뉴얼에 적혀 있어서……."
지금까지 침착하게 말해오던 신리가 갑자기 말하는 것을 주저하기 시작했다.
"뭐야, 그 매뉴얼이라는건."
"그, 재해가 발생했을 때의 대처 요령인데요, 부끄러운 얘기지만 이 근처에서 재해가 발견된 것은 하윤이 최초 사례라서, 저희 쪽의 대응이 아직 미숙한터라 요원들은 모두 매뉴얼을 참고하라고 지시가 떨어져서……. 거기에 적혀 있었거든요. '재인災因이 되는 인물과 친한 사람을 포섭하라'라고."
"그래서 나를?"
"네. 조금 조사를 해보니 서림 씨는 이런 허무맹랑한 이야기에도 익숙한 취미생활을 가지고 있더군요? 아, 딱히 꺼려한다거나 하는 건 아니에요. 재해라는 게 사실 워낙 비현실적이라 오히려 그런 가공의 이야기가 익숙한 사람들이 대처가 능숙하다고 통계자료도 있으니까요."
음. 아무래도 나와 만나기 전에 뒷조사도 한 모양이었다.
보고 즐기는 게 서브컬쳐쪽인 건 맞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를 곧바로 받아들이는 건 아니었다.
뭐, 신리가 소속된 기구의 하는 일을 보아하니 말해서 좋을 일은 없을 것 같으니 함구해두어야 겠지만.
"저희가 서림 씨에게 기대하는 역할은 하윤과 최대한 많이 접촉해서 이상 현상을 발생시키는 인물에 관한 정보를 모아주는 것입니다. 언제 어떻게 초상현상에 의한 재해가 발생할지를 예측하는데 도움이 될테니까요. 그런 정보 수집 관련은 제가 도맡아 하고 있으니, 저와 같이 움직여 주셨으면 해요."
신리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아무래도 부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잠깐, 잠깐, 고개 들어봐. 아직 묻고 싶은게 많다고. 너희가 그런 재해를 미연에 방지하고 싶어한다는 건 알았는데, 결국 그 소리는 윤을 어떻게 하고 싶다는 거 아냐?"
"아뇨, 그건 아니에요."
"아니라고?"
"네. 아, 이것도 매뉴얼에 나와있는 얘기지만……, 저희 기구는 재해의 원인이 되는 인물을 직접적으로 어떻게 한다거나 하지는 않아요. 인권이니 뭐니해서 조금 미묘한 문제도 있지만, 현실적으로 초상현상을 마음대로 다루는 인물들을 저희가 제어할 수단이 없거든요. 아까 미리 막는 게 일이라고는 했지만, 그런 일은 거의 불가능하고……, 거의 뒷처리만 하고 있는 실정이죠. 때문에 이번 일도 하윤과 직접 대면하지 않고 서림 씨에게 협력을 구한다는 에두르는 방법을 이용할 수 밖에 없는 거에요."
과연.
확실히 어제 일어난 폭발같은 일을 자유자재로 벌일 수 있다면 신병을 구속하는 것조차 힘들 것이다. 현대 기술을 동원하면 그렇게 못 할 것도 없겠지만, 그러기엔 품이 너무 많이 들고, 또 신리의 말에 따르면 그럴 여유도 없는 모양인 것 같다.
명색이 국제 기구라면서 그런 위험한 일에 고등학생 여자애를 투입하는 꼴이니, 생각보다 그렇게 대단한 집단은 아닐지도 모른다.
내가 넌지시 그런 이야기를 했더니,
"아! ……네. 확실히 그렇네요. 기구 자체도 그렇게 풍족한 편은 아니지만, 이 근방은 지금까지 재해도 없었던 터라 자원도 물자도, 인원도 전부 부족해요. 경험도 없고요. 그렇지만 제가 이 일에 투입된 건 꼭 그런 이유뿐만은 아니고, 고등학교에 투입할만한 나이대의 요원이 저밖에 없어서 그런거에요. 아무래도 하윤이 고등학생이니 근처에서 관찰하는 게 좋을 거라고 상부에서 판단했거든요."
어쩐지 신리가 변명하는 투의 대답이 됐지만, 신리 자신에겐 그런 자각이 없는 것 같다.
"아무튼, 저희 사정은 대충 이런데…… 서림 씨가 꼭 도와주셨으면 해요. 어제의 폭발 이후로는 잠잠한 것 같지만 또 언제 일이 터질지 모르는데다가, 그만한 폭발이 시가지에서 일어나면 피해가 엄청날 거에요. 되도록이면 그런 사태가 벌어지기 전에 막고 싶어요."
나는 팔짱을 끼고 생각하는 모양새를 취했다.
사실은 생각할 것도 없는 내용이었다. 윤이 모종의 사건에 휘말렸고, 그로 인해 일반 시민들에게 피해가 가는걸 막고자 하는 집단이 내게 도움을 요청했다. 기구는 윤을 붙잡는다거나 하지는 않는다고 했으니, 내가 다소 귀찮음을 감수하면 모두가 좋은 상태가 될 것이다.
더불어, 기구의 존재는 미심쩍지만, 눈 앞에 있는 신리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윤에 관한 것도, 요새 보이는 수상한 행동과 더불어 전학생의 존재를 생각하면 신리의 말은 어느정도의 신빙성은 갖추고 있는 것 같다. 적어도 지금 여기서 한 말 중에 앞뒤가 모순되는 말은 없었다.
하지만.
내가 주저하고 있는 것은 조금 다른 방향의 고민 때문이었다.
모두가 좋은 일이라고는 하지만, 아무런 결심도 없이 또 이런 비일상에 휘말려도 좋을지, 어떨지 하는 고민.
……마음 한 켠이 걸리지 않는 건 아니지만.
이미 지나간 일을 너무 마음에 두지 않는 게 좋겠지.
"……적극적으로 도와주지는 못하겠지만, 윤의 동향을 알려주는 정도라면 도와줄게."
"정말인가요? 그것만으로 충분해요. 감사합니다."
......
"어쩔 셈인가요?"
"뭐, 일단 따라오기나 해봐. 가면서 설명해줄게."
나는 주저하는 신리를 잡아 끌면서 윤의 집으로 향했다.
윤에게는 미리 연락을 해놨고, 집에 예의 '기사'와 '공주', 그 두 녀석들도 있다는 것도 연에게 물어 확인했다.
"지금 당면한 문제는 기사나 공주가 어떻게 움직일지 예상이 안된다는 거잖아?"
"…네, 그렇죠. 뭐가 문제인지는 파악이 됐지만, 정작 본인들의 움직임이 예상이 안되면 미리 대책을 세울 수가 없어서, 지금 곤란한 상황이에요."
"그러니까, 물어보러 가자."
"네?"
"본인들한테 직접 물어보러 가자고. 지금 윤네 집으로 가는 길이야. 걔네들도 거기에 있다고 하니까, 가서 물어보자고."
"네?"
착실하게 나를 따라오면서도 상황 파악이 안되는지 계속 네?를 연발하는 신리를 달래면서 나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언제 또 그저께와 같은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정보가 모이지 않았다고 움직이지 않는 것은 언제나 뒤처리만 담당하던 기구의 성격에는 잘 들어맞을뿐, 하나도 좋을 게 없다.
미리 막을 수 있으면 막는다, 그게 아니라면 은폐한다.
이게 기구의 모토라는 걸 그들 자신이 잊어버리고 있는 것 같은 상태다.
일이 당장 벌어진게 아닌 이상, 지금은 충분히 '미리 막을 수 있는 상황'에 들어간다고 나는 생각했다. 학교는 휴교인 상태고 때마침 그녀석들도 윤과 같이 있다고 하니 정보를 얻을 좋은 기회다.
오늘을 놓치면 또 다시 언제 일이 터질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수동적인 자세로 돌아서야 할지도 모른다.
"참고로 오늘 명목상의 방문 목적은 윤에게 내 새로운 여자친구를 소개하러 가는 상황이니까, 입을 잘 맞춰야 돼."
"네!?"
아까부터 네!? 만 연발하고 있지만, 뭐, 본질은 빠릿빠릿한 녀석이니 임기응변도 능할 것이다.
신리가 윤을 상대하는 동안 나는 기사나 공주에게 접촉해 정보를 얻는다는 게 일단은 기본적인 작전이다.
"그, 그런데 보통 친구 집까지 가면서 여, 여, 여자친구를 소개하거나 하나요? 아무래도 그건 이상한 것 같은데……."
"여자친구가 생기면 소개해주기로 옛날에 그랬었거든. 아무튼 그런 것보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신리를 바라봤다.
"네가 윤을 상대하는 동안 내가 기사나 공주한테 접촉해볼거야. 되도록이면 원하는 방향으로 일을 진행시킬 수 있으면 좋겠지만, 적어도 전후 사정정도는 들을 수 있도록 노력해볼게. 너는 윤을 최대한 붙잡아두고 시간을 끌어봐. 아마 내 여자친구라고 하면 오지랖 넓은 그녀석은 이것저것 물어볼테니 적당히 대꾸해주면 될 거야."
"적당히 대꾸라니…… 미리 입을 맞추거나 해야하지 않나요?"
"어차피 나한테 똑같은 질문을 하진 않을테니, 네가 대답한 내용만 나중에 다시 알려주는 정도면 되겠지."
....
신리가 진땀을 흘리며 윤의 질문에 대답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화장실을 다녀오겠다고 말하고는 거실을 나왔다.
기사라는 까만머리 녀석은 윤 옆에 찰싹 붙어있으니, 일단은 공주라는 노란머리 녀석을 타겟으로 삼기로 했다. 여동생과 둘이 사는 주제에 쓸데없이 넓은 집 안을 찾아다녀야 하나, 생각했으나 공주는 2층으로 통하는 계단 옆에서 윤을 바라보며 이를 갈고 있었다.
뭐하는 거야, 저녀석?
가까이 다가가니 '……으으, 내가 저 자리에 있어야……만 이겼어도……'하는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야, 노랑이."
"히익! 뭐, 뭐야?"
뒤에서 적당히 말을 거니 소스라치게 놀라는 공주.
명색이 공주라면서 행동거지가 조신하지 못했지만, 원체 사람같지 않은 미모였기 때문에 얼빠진 모습도 연극의 한 장면 같았다.
"너, 너는……! 윤의 친구라고 하던 그녀석이구나. 이름은 확실히…… 어딘가 서리가 내릴 것 같은 이름이었지."
"그정도까지 안 것도 감지덕지지만, 조금 더 노력해서 앞으로는 제대로 기억해줘. 한서림이다."
"그, 그렇군. 근데 나한테 무슨 일이냐? 나는 윤을 감시해야 하는데…… 아앗! 저녀석이 또! 윤한테! 들러붙어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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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당신은 일주일 뒤에 죽습니다'
이 같은 말을 듣게 된다면 기분이 어떨까.
시작부터 화자가 죽음을 선고받는다는 충격적인 면 때문인지, 스토리의 도입부에 이러한 대사를 던지고 시작하는 만화나 소설은 찾아보면 의외로 많은 걸 알 수 있다.
그런 작품들의 등장인물은 하나같이 믿지 않으려고 하다가 결국엔 믿게 되는 이야기로 흐르게 되지만, 이게 평범한 반응이겠지. 자신이 정말로 죽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그들은 삶을 정리하면서, 잊고 있던 약속을 지킨다거나, 오랫동안 만나지 않았던 친구를 만난다거나, 가족과 시간을 보낸다거나 혹은 그런 선고를 해준 인물과 사랑에 빠진다거나, 그런 아름다운 이야기를 그려내곤 한다.
그런 종류의 이야기를 볼 때면 문득, 부질없이 살아가는 몇 십년보다 의미있는 일주일이 더 가치있게 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그래서, 무슨 이유로 이런 이야기를 꺼냈느냐 하면,
본인이 저 이야기의 당사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1.
더위가 꺾이자마자, 비켜났던 자리를 얼른 되찾으려는 듯, 숨가쁘게 추워진 초겨울의 어느 날이었다.
서늘한 냉기에 몸을 옹송그리면서, 나는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아무런 전조도 없이 방 중앙에서 성스러운, 정말로 성스럽고 화사한 빛을 내면서 천사가 나타났다.
머리에는 불가사의한 빛을 내뿜는 원형의 고리, 견갑골에서 자라난 새하얗고 부드러워 보이는 날개. 어쩐지 머리카락은 먹 빛이었지만, 오히려 그 점이 흰색의 소박한 원피스나 흰 피부와 대조되어 멋져보이는, 그런 천사였다.
그야말로 그림으로 그린 듯 한 모습의 천사였기에, 나는 성스럽지만 이상한 빛이 내뿜어지면서, 천사가 완전히 등장하기까지 1분 가량의 시간이 있었는데도 아무런 반응을 하지못하고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천사가 등장을 마치고 내 침대 위에 가만히 내려서자, 성스럽고 따스한 빛은 사라졌다.
나는 여전히 입을 벌리고 어찌해야할지 모르는 상태로 천사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천사는 그런 나를 보더니 해사한 미소를 한 번 짓고는,
"당신은 일주일 뒤에 죽습니다."
라고 말했다.
"……뭐라고?"
그 말에 반쯤 떠나있던 정신이 돌아왔다. 방 안에 천사따위가 나오다니, 차고 넘칠 정도의 비일상적이고 이상한 사건이지만, 천사가 처음 내뱉은 말이 죽음 선고라는 건 이상하다.
내가 반사적으로 되묻자, 천사는 친절하게도 다시 대답해줬다.
"당신의 수명은, 정확히 앞으로 6일 15시간 11분 뒤에 끝이 납니다."
6일 15시간. 본래라면 믿기 힘든 얘기지만, 너무나도 성스러운 빛과 함께 등장한 천사가 한 말이기에 신뢰도는 높아 보였다. 아니, 그보다도,
"6일이라고!? 6일!"
"네, 네."
내가 갑자기 소리를 치자, 천사는 조금 당황한 것 같았다. 따뜻해 보이는 날개가 1/3가량 움츠러들었다.
"수명이 6일 남았다고? 10일 뒤에 있는 조별 과제 발표는 어떻게 하고! 온갖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준비한 발표인데!!! 게다가 보름 뒤에 있는 자격증 시험은? 1년 동안 준비한 시험이란 말이야!!"
하필이면 6일 뒤라니. 시험도 보기 전에 죽어버리려고 나는 지난 1년 동안 그렇게 고생을 했던가. 게다가 점수 비중이 컸기 때문에 울며 겨자먹기로 준비했던 조별 과제는 또 어쩌고. 조원들이 눈물나게 비협조적이어서 나는 과제 대다수를 혼자 처리해야 했다. 발표까지 내가 하면서, 이 과제는 제가 다했습니다, 라고 소소하게 복수를 할 예정이었는데, 죽어버리면 그녀석들만 좋은 일이 아닌가! 아직 죽지도 않았지만, 이대로 죽어버린다면 원한이 하늘까지 사무쳐 당장이라도 구천을 떠돌 수 있을 것 같았다.
"……조금 이해가 부족한 것 같아서,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당신의 수명이 6일 남았다는 건, 즉, 당신이 6일 뒤에 죽는다는 겁니다. 시험이니 과제니 신경 쓸 여유가 있나요?"
"물론이지! 수명이 6일 밖에 남지 않았다는 건 뭔가 이유가 있어서 그런 거 아냐? 병 같은 건 걸린 기억이 없지만, 잠잘 때 돌연사 하는 걸지도 모르고, 정석적이라면 교통사고겠네. 물어봐도 사인은 안알려주겠지?"
"당연합니다."
"그리고 이제와서 물어보는 거지만, 넌 진짜 천사고 수명이 6일 남았다는 것도 사실이지?"
"물론입니다."
천사가 어딘가 뽐내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런 천사를 시큰둥한 눈으로 쳐다보면서,
"그러니까 당연히 시험이니 과제니 하는 걸 신경쓸 수 밖에. 어차피 죽을거면 보람차게 일을 해치우고 난 뒤에 죽어도 상관없잖아? 지난 1년 동안 열심히 준비해온 것들을 하나도 발휘하지 못하고 죽어버리면 너무 억울하다고!"
"그런 문제인가요?"
"그런 문제야! 한 일주일만 수명이 늘어도, 마음 편히 죽을 수 있을텐데."
"미안합니다만, 그런 건 불가능합니다."
표정은 전혀 미안해보이지 않았지만, 천사는 그렇게 말했다.
일말의 기대를 담았었지만, 역시 안되나보다.
"신도 너무하시지. 아니면, 이건 그건가? 내가 남은 일주일동안 뭔가의 조건을 만족시키면 죽지 않고 살 수 있다던가? 깨달음을 얻으면 되는건가?"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면, 일주일동안 나를 감시할 의무에 처한 너와 내가 사랑에 빠져서 수명이 늘어나는 전개는 어때?"
"당연하지만, 그럴 예정은 전혀 없습니다."
온 몸에서 느껴지는 단호한 태도였다.
그 정도로 거부할 것까진 없지 않을까. 조금 상처받았다.
"그러니까, 나는 아무런 방도도 방책도 없이 일주일 뒤에 완벽하고 완전하게 죽음을 맞는다는 소린가. 1년 동안 준비해온 시험은 치지도 못하고, 온갖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겨우 완성시킨 조별 과제는 발표도 못한 채 조원들이 날름 먹어치울테고, 조원이 죽었다는 핑계로 동정표를 사서 그녀석들은 A+를 받겠지……, 아아, 억울하다, 억울해. 억울해서 죽을 것 같다!"
그 후로 나는 약 10분 정도를 소비해서, 온갖 짜증과 억울함과 허망함을 쏟아냈고, 천사는 그걸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렇게 감정을 쏟아내고 나니,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제 끝난 건가요?"
"그래. 이제 일주일동안 뭘 하면서 지낼지 생각해 봐야겠어."
"이상할정도로 차분한데, 혹시 죽음을 예견하셨습니까?"
천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렇게 물어왔다. 귀엽기짝이 없는 동작이었지만, 조형이 아름답다보니 그것만으로도 그림이 됐다. 물론, 질문은 멍청하기가 이를 데가 없는 질문이다.
"그딴 걸 미리 알았으면, 내가 제대로 놀지도 않고 공부를 했을리가 없고, 조별 과제 따위는 일찌감치 때려쳤겠지. 무슨 질문이 그렇게 바보같냐?"
"……"
한차례 쏘아줬더니, 천사는 울컥한 얼굴을 하더니, 입 안으로 뭐라고 궁시렁거렸다.
그런 천사를 보면서, 나는 제일 이제서야 떠오른 의문을 입에 담았다.
"그나저나, 죽음을 알리는 건 사신이 해야될 일 아냐? 천사가 있으면 사신이나 악마도 있겠지?"
----
0.
목숨과도 같이 소중한 단 하나의 무언가를 뺏긴 사람처럼 울부짖고 절망할 거라고.
당장 내일 죽는다는 선고를 들은 사람이 보는 세상처럼 세상이 색을 잃을 거라고.
이제 한 번 쓰러지면,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거라고.
눈물로 온 몸의 수분이 메말라, 침 조차 삼키지 못할 거라고.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의외로 덤덤하게,
나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1.
신리가 그렇게 되고 한달이 흘렀다.
개인의 감정과는 별개로 시간은 무참하게 흐르고, 세상은 개인의 사정따윈 봐주지 않는다. 공식적으로 신리는 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이기에,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낮에는 일상생활을 영위해야만 했고, 밤에는 파트너 없이 이상현상을 처리해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신리와 있을 때에 비하면 처리해야 되는 일감이 줄었다는 정도일까.
나타나는 현상의 수와 관계없이, 나는 매일 같이 자정에 그 장소에 들려, 결계를 보강했다. 결계의 유효기간은 2일이니 실제로 그 장소에 쳐진 결계는 기껏해야 두 겹이지만, 그 장소에 갈 때면, 아주 두꺼운 무언가로 가로막힌 것처럼 답답함을 느꼈다.
결계를 새로 치는 건 5초면 가능하지만, 나는 언제나 5분 정도, 그 장소의 답답한 공기를 느끼며 있곤 했다.
신리가 그 장소에 있는걸 느낄 수 있다든가, 신리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린다든가 하는 로맨틱한 이유로 있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에고를 위한 행동이다.
그 장소를 서성이는 5분 간, 언제나 극심한 후회와 그리움, 그리고 아주 조금의 안도를 느끼며, 나는 매일 같이 그 답답한 공기를 들이마시고 있다.
기관측에서 파견된 신리의 후임자는 한달하고 하루째에 내 집에 도착했다.
신리와 비슷한 나이대의 여자아이였다.
신리에 관해서는 보고서를 작성했기 때문에, 기관은 전후 사정을 알고 있을터이니, 쓸데없는 배려를 해준걸지도 모른다.
예전에 신리가 자랑하듯 말했던 말이 불현듯 생각났다.
'이 정도 나이에 일을 시작할 수 있는 인재는 얼마 없으니까, 고맙게 여기라'고.
집 안으로 들여보내고, 식탁에 마주앉을 때까지, 그녀는 어쩐지 침착하지 못한 태도로 내 눈치를 살폈다.
그 노골적으로 나를 걱정하는 태도에, 나는 조금 짜증을 느꼈다.
"전임자의 얘기는 들었나?"
"……네. 저기, 그 일은 정말……"
"미안하지만, 전임자와 짰던 스케쥴을 따라줘야겠어. 오전부터 일몰까진 개인시간. 일몰부터는 서로 보이는 거리에서 생활할 것. 순회는 밤 9시부터 11시 30분까지. 조정할 필요가 있다면 얘기정돈 들어줄테니 말해봐."
직설적인 어조에 그녀는 다소 움츠러들었지만, 이내 정신을 차렸는지 의연한 표정으로 내 이야기를 곱씹고 있었다. 일단은 기관의 파견직원. 이 나이대에 일을 시작할 정도니 사리분별은 있다는 소리겠지.
잠시 생각하던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네, 문제없어요. 그렇게 따르겠습니다."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한가지 더. 순회가 끝나면 나는 개인적인 용무로 자리를 비울텐데, 그 때부터는 너 좋을대로 해도 돼. 날 따라오거나 하지만 않으면."
"저, 저기! 그 때는 무척 위험한 시간대인데요. 따로 다니면 빠른 대처가 불가능하고, 그……."
"네가 올 때까지 한달 동안 나는 혼자서 다녔어. 게다가 통계적으로 그 시간대에 이상현상의 빈도가 극히 낮은 건 너도 알겠지?"
"네, 그건 알지만…… 빈도보다 심도의 문제가……."
"그런 것까지 포함해서 괜찮다는 소리야. 혹시나 그 때 나온다면, 널 부르든, 내가 혼자 처리하든 알아서 할테니 쓸데없는 걱정은 필요없어."
"......"
그녀는 불만스런 표정이었지만, 나는 이 건을 양보하려는 마음은 전혀 없다. 자정은 내 고유의 시간이다. 신리의 후임으로 온 그녀가 방해할 수 있는 시간이 아니다.
"별 다른 의견이 없으면 오늘부터 스케쥴대로 하는걸로."
"…알겠습니다. 아, 한가지 물어볼게 있는데요"
"?"
"이전에 당신과 파트너였던 분은, 여기서 살았나요?"
그제서야 나는 그녀가 캐리어를 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 빈 방을 하나 빌렸었지." "괜찮으시다면, 저도 그렇게 해도 될까요?"
조심스럽게 그녀가 그렇게 물었다.
집에 다른 식구도 없고, 빈 방은 어느 정도 있었지만, 사람이 살만한 공간은 내 방을 제외하곤 신리가 살던 방밖에 없다. 나머지 방은 언제 마지막으로 청소를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방치되어 있었다.
신리는 그다지 소지품을 챙기는 타입의 인간은 아니었다. 신리가 그렇게 된 이후로 한 번도 들어가지 않았지만, 아마, 책 몇 권이 전부일테지.
그녀가 신리의 방을 쓴다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그렇다고 거절한다면, 내가 아직도 신리를 신경쓰고 있다고 착각한 그녀는 더욱 내 눈치를 볼 것이다.
나는 스멀스멀 올라오려는 불쾌감을 의식적으로 배제하며 그녀를 신리의 방으로 안내했다.
"아……."
한 달동안 방치되어 있었음에도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남아있는 방을 보고, 그녀는 이게 신리가 쓰던 방이라는 것을 깨달았나 보다. 또 다시 안절부절 못하면서 나를 힐끗힐끗 보고 있다.
그러더니 몹시 죄송스러운 어조로,
"제가, 이 방을 써도 될까요? 다른 방이 있다면 그쪽으로……."
"다른 방은 정리가 안되어 있으니까, 쓴다면 이쪽으로 해. 조금만 정리하면 바로 쓸 수 있을테니까."
"……네."
"나는 내 방에 있을테니까 뭔가 필요하면 불러."
"알겠습니다."
주춤대며 캐리어를 끌며 살풍경한 방을 둘러보는 그녀를 두고, 나는 방을 나왔다.
순회를 도는 시간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기에, TV라도 볼까 싶었지만, 이내 포기하고 내 방의 침대에 엎어졌다.
이상하게 진정이 안되는 기분이다.
오랫만에 자신 이외의 사람이 집에 있어서 그런걸까.
아니면,
신리 이외의 사람이 있기 때문일까.
한달 동안 혼자서 현상들을 처리하면서, 신리의 빈자리를 느끼지 못했다면 거짓말이지만, 결정적인 차이를 느끼지 못한 것도 사실이었다. 신리가 없다는 것을 머리로 인식하고, 그걸 슬프다고 느끼는 것과 별개로, 현상을 처리하는 일에 있어서는 어쩐지 신리가 장기간 자리를 비운 것과 같은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마치, 언젠가 다시 돌아올 것을 확신하는 것처럼.
신리가 그렇게 되기 이전에도 여러가지 사정 때문에 혼자서 순회를 도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에, 그 때의 경험탓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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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를 보니 7시 30분. 슬슬 나타날 시간이다.
슬쩍 고개를 돌려보니, 유리는 꼼꼼하게도 식빵을 입에 물고 결의에 찬 눈빛을 내쪽으로 쏘아보내고 있었다. 절박함과 간절함, 그리고 긴장이 골고루 섞인 그 시선에 속으로 황당해하면서, 나는 다시 골목 너머를 살펴본다.
멀리서 다가오는 사람 하나.
그 사람은 우리 학교의 교복을 주름 하나 없이 깔끔하게 차려입고, 반듯한 자세로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과연. 날카로운 눈매와 안경 때문인지는 몰라도, 전체적으로 날이 선 느낌에 이지적이고 냉철한 분위기가 풍겼다. 유리는 그런 면에 반한 거겠지. 일생동안 '단호한 결정'이라고는 한 번도 해본적이 없는 우유부단의 극치를 달리는 제 오빠만 보던 유리였으니, 저런 분위기를 가진 사람에게 첫 눈에 반해버려도 이상할 것은 없다. 여동생 보호가 과도한 유리의 오빠-이자 내 친구다-쪽은 이런 건 안된다고 결사 반대를 할 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런 쪽에선 관대한 편이다. 덕분에 이렇게 유리를 도와주는 처지이지만.
다시 고개를 돌려 유리를 본다.
입에 물고 있던 식빵이 뭔가 마음에 안드는지 가방에서 새 식빵을 꺼내서 다시 입에 물고 있다. 잔뜩 긴장했는지 손을 덜덜 떨면서 식빵을 무는 모습을 보니 어쩐지 안쓰러워 보인다.
"……굳이 식빵을 물 필요는 없잖아?"
여기까지 오면서 몇 번이고 했던 말에, 유리는 고개를 좌우로 저으면서 똑같은 대답을 되돌려줬다. 유리의 내면에서 식빵이라는 요소는 굉장히 중요한 것 같다.
유리가 눈으로 얼마나 남았냐고 물어오기에, 나는 재차 고개를 내밀어 확인한다. 앞으로 10초 정도면 도착할 것 같았기에, 나는 유리에게 두 손을 펴서 알려줬다.
작전의 요지는 이렇다.
첫 눈에 반했음에도 불구하고 접점이 아무 것도 없었기에, 되도록이면 강한 첫 인상을 남기고 싶다는 유리의 요청을 받아들인 작전이다. 절차는 간단. 골목길을 돌아올 때 유리가 달려가서 냅다 부딪힌다는 고전적인 방법이다. 개인적으로는 별다른 의미를 찾기 힘든 작전이지만, 뭐, 본인이 이게 좋다고 하니까. 옆에서 단순히 도와주는 역할인 내게 선택권은 없었다.
서로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나는 건너편 길가에 있는 우편함 옆에 숨었다. 앞으로 5초가량. 유리는 식빵이 입에 잘 물려있나 확인하고, 가방을 확실하게 들고, 골목길을 향해 적절한 속도로 달려나갈 준비를 한다.
3, 2, 1─
땅-! 하는 소리와 함께 유리가 튀어나가 부딪히는 모습을 머릿속에서 그렸지만, 유리는 달려나가려는 포즈 그대로 얼어버린 채였다.
"……이런."
여전히 반듯한 자세로 그녀석이 골목길을 돌아, 얼어있는 유리쪽으로 잠깐 시선을 준 뒤,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걸어간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일정한 보폭으로, 앞으로, 쭉.
이윽고 다음 골목길에서 방향을 꺾어 그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유리는 어정쩡한 자세로 얼어있었다. 그리고 골목길 너머로 사라지자 그 자리에 무너지듯 주저앉는다.
황급히 다가갔다.
"야, 뭐하고 있었어? 왜 안 뛰어든거야?"
주저앉은 채로 유리가 내쪽을 바라본다.
"오, 오빠, 너무 긴장해서 모, 몸이 안 움직였어요. 어, 얼굴을 보니까 그대로 굳어버려서, 도, 도저히 다, 달려들 수가……"
"……."
멍청이. 그럴 거면 애초에 이런 작전을 짜질 말았어야지── 라는 말은 마음 속에만 담아두기로 했다. 유리의 상태를 보아하니 정말로 긴장한 모양이고.
아직도 주저앉은 채 일어날 생각을 안하기에, 유리를 잡아 일으켜 세웠다.
적당히 먼지도 털어내고, 떨어진 가방도 줍고, 식빵은 줏어서 우편함 옆에 있던 쓰레기통에 버리고 올 동안 유리는 여전히 착란 중이었다.
"어, 어, 어떡해, 분명 이, 이상한 여자라고 생각했을텐데…… 이상한, 여자라고, 생각했을텐데! 으아아아-"
뭐, 확실히.
식빵을 입에 물고 금방이라도 달려나갈 것 같은 자세로 멈춰있는 여자를 보면 누구라도 이상하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녀석은 어쩐지 그런 것에 신경을 쓰지 않을 것 같았다. 유리쪽을 봤을 때도 무표정한 채, 일말의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그야말로 무관심. 옆에 있는 동상을 보는 수준의 반응이었다.
하지만, 이런 걸 구구절절 유리가 제대로 들을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가방을 들어 여전히 '이상한 여자' 운운하면서 중얼대는 유리의 머리를 살짝, 내리쳤다.
"히끅!?"
"이상한 여자면 이상한 여자대로 강렬한 첫 인상이잖아? 그 정도만 해 둬."
"하지만……."
"하지만은 무슨. 제대로 작전대로 안 한 네 잘못이야."
"그, 그건 그렇지만……. 어쩔 수가 없잖아요!?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긴장해버려서, 몸이 안 움직여지는데! 기다리는 동안에도 머릿속이 터져버릴 것 같았는데, 으으, 결국 이 모양이라니……. 오빠는 그런 적 없어요? 심장은 무지 빠르게 뛰는데, 몸이 굳어져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그런 상황요."
그런 적이 있을 리가 있나.
다른 상황에서 들었다면, 그런 핑크빛 망상은 만화책으로만 즐기라고 말했을테지만, 눈 앞에서 그런 꼴을 봐버린 이상 그런 식으로 매도는 못하겠다.
"그런 것보다, 이상한 인상이 남지 않았을까 걱정하는 것 같은데, 그리 신경 쓸 필요는 없지 않을까? 아까보니 너는 안중에도 없는 듯이 걸어가고 있었고. 무표정하니, 아무런 변함없이 그대로 걸어갔어."
걱정을 덜어주려고 한 말이었지만, 유리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 그런가요. 그건 그거대로 조금 충격이네요……. "
아직 여름이라고 불리기엔 쌀쌀한 바람이 뺨을 때렸다. 이 근방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기도 한 학교 옥상에 불어오는 매서운 바람은 철창 사이를 뚫고 내리쬐는 초여름의 태양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그런 바람을 세차게 맞으며 옥상 중앙에 서 있는 두 명의 모습이 보인다. 긴 머리를 휘날리며 꼿꼿하게 서 있는 유리와, 여전히 차가운 표정으로 다가오는 사람을 거절하는 듯한 분위기를 내뿜고 있는 그녀석. 그리고, 나는 구석 한 켠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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