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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8월 9일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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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히키가야 하치만
짧은 것 같으면서도 긴 것 같던 고교 3년 간은 이렇다 할 큰 사건 없이 졸업을 맞이했다.
어떤 면에선 결국 진실을 가장하고 거짓된 관계를 지속하던, 그곳, 봉사부의 활동도 졸업식과 함께 끝.
중간에 몇 차례의 위기도 있었지만, 나와 그녀들은 잘 해낸 편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일말의 위화감을 안은 상태였어도, 그걸로 충분하지 않을까.
결국, 우리들은 친구가 될 수 없었다 하더라도.
대학에 가면 고교때와 다르게 이런저런 일들이 많이 벌어질거라는, 졸업식 때의 히라츠카 선생님의 충고와는 다르게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몸과 마음의 고향인 치바를 떠나 혼자 자취하는 생활이 됐기 때문에 생활 전반에서는 큰 변화가 있었지만, 학교쪽은 전혀, 아무것도, 없었다.
고교때는 반이라는 그룹에 묶여 강제로 참가해야하는 이벤트가 많았기에 나의 의사와는 다르게 여러가지 사건들이 일어나는데다가 봉사부라는 의미불명의 활동을 하고 있었던 점도 있어서, 그 나름대로 다이나믹한 고교생활을 보낸게 아닌가 하고 되새겨 볼 정도였다.
자유로운 생활이라는 것은 곧, 자신이 나서서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걸 뜻한다.
뭐, 고교때 봉사부 활동도 결코 내가 자발적으로 시작한 건 아니었지만, 대학에선 문제아를 이끌어 줄 히라츠카 선생님같은 사람도 없다.
이래서야 대학 때도 외톨이 확정이구만!
어차피 지금껏 늘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예정인 외톨이 생활에 거부감은 전혀 없다.
……라고 생각했으나, 짬을 내어 자취방에 놀러온 코마치에게 따끔하게 혼이 나버렸다.
'대학엔 이런저런 서클이 있을 거 아냐? 오빠도 그런 것 좀 해봐!' 라고.
이미 어지간한 서클의 신입생 모집기간은 끝나버렸고, 이제와서 내가 할 만한 서클이 있을 것 같진 않다만, 나는 사랑스런 동생의 충고를 넘길 정도로 막돼먹은 오빠가 아니다.
여러 서클이 밀집되어있는 특별동을 한가로이 거닐면서 가만히 앉아서 책만 읽어도 생산적인 활동을 하고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질 수 있는 서클은 없나, 하면서 둘러보는 와중에,
나는 발견했다.
발견하고야 말았다.
'봉사서클'이라는 문패가 달린 방을.
내가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라면, '에, 봉사서클? 뭐야 이거, 의뢰하면 이런저런 일들을 봉사해주는 건가? 우헤헤헤'라고 생각하거나 아니면, 그저 평범하게 봉사활동을 하는 서클이라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나는,
저런 이름에 특별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뭔지 모를 열기가 몸을 휘감는 걸 느끼며 무심코 노크도 하지 않고 문을 열어버린 나는, 거기서,
그녀를 만났다.
1. 잇시키 이로하.
오늘은 기념할만한 날.
그래, 나, 잇시키 이로하의 대학 합격이 결정된 날이다.
아아~ 힘들었지.
3학년이 돼서는 어쩐지, 쓸쓸한 학교생활이 계속되는 바람에 매사 의욕없이 지내다가 이럴 거면 차라리 공부에 전념하자, 라고 결심한 게 학기 중반.
지망교는 구체적으로 생각해놓은 게 없었다.
그런데도 어쩐지 진로희망조사서에는 매번 모 사립대학 문과를 넣어버렸기에 이왕 이렇게 된 거 그쪽을 진심으로 노리게 됐다.
주변의 뜬금없다는 반응에 변명하며 공부하던 동안 이런저런 소문이 돌기도 했다.
잇시키가 누군가를 따라서 그쪽에 지망했다나 뭐라나 하는 소문.
뭐어, 확실히 아는 누군가가 다니는 학교이긴 했다. 별로, 따라서 지망하거나 한 건 아닐텐데, 그런 소문을 듣고 순간 가슴에 찌릿- 하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아무튼 지금은 그런 것보다.
지난 1년 간, 연락할 명분이 없어서 끙끙댔던 내게 있어서 합격 발표는 그야말로 좋은 기회였기에, 빠르게도 그 사람에게 연락을 했다.
내심 엄청나게 두근거렸지만, 겉으로는 전혀 내색을 하지 않은 채,
"선배에~ 대학 붙었으니 술 사주세요, 술!"
[아니, 너 아직 미성년자잖냐…….]
어쩐지 그리워지는 대화를 나누며, 결국 약속을 GET.
장소는 치바역 근방이면 되겠냐? 라는 선배의 말을 넘기고, 여러가지 구경할 겸 내가 그쪽으로 간다고 말했다.
선배는 학교를 구경해달라는 소리로 알아들은 모양이지만.
'여러가지'에는 이것저것 포함되어있다고요, 선배.
학교 근처의 역에서 1시까지.
마음이 들뜬 나머지 30분 일찍 도착해버렸는데, 역시나 선배는 나와있지 않.... 아니, 나와있잖아!
'오래 기다렸어요?'라고 물어보니 툴툴대면서 지금 왔다고, 선배는 그렇게 말했다.
뭐랄까, 예전과 변함이 없는 것 같아서 나는 속으로 즐거워했다.
1년 만에 만나는 선배는,
"선배, 변한 게 없네요?"
"1년동안 갑자기 변하면 무섭겠지. 얼른 가자고."
"에에, 1년 만에 만났는데 안부 인사도 안해주나요? 사랑스럽고 귀여운 후배인데! 이제 또 정말로 후배가 되는데!"
변함없는 그 모습에 나도 1년 전 어느 때와 같은 말투로 말해봤더니,
선배가 미묘한 표정을 짓는다.
"너야말로 변한게 없구만. 대학에 오면 대학데뷔라는 명목으로 너 같은 여자애가 널려서 사람들도 내성이 되어있으니까 말이야. 너도 조심하라고."
"그, 그런가요. 대학교에도 저 같이 귀여운 여자애가 많다는 건 어쩐지 믿기 힘든데요오……."
"아니…… 너의 그런 태도를 말하는 거라고……. 아무튼 얼른 가자. 점심은 먹고 왔냐?"
"아뇨, 사주세요!"
벌써부터 피곤해보이는 눈을 하는 선배에게 약간 시무룩해질뻔 하면서도, 그 변함없는 모습에 지난 1년 간의 서운함이 날아가는걸 느끼는 나도 있었다.
벌써 척척 걸어가는 선배의 팔을 붙잡으며,
대학교에 가서도 언젠가의 그 때처럼, 그렇게 지낼 수 있을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랬어야 했는데.
점심은 어쩐지 옛날을 생각하게 만드는 라면이었다.
"뭐, 저도 그 이후로 가끔 먹으러 가곤 했지만요… 1년 만에 보는 후배랑 먹는 점심인데……."
"그래도 맛있었잖냐?"
"그, 그건 그래요. 인정하긴 싫지만……."
나로서는 무드고 뭐고 없는 분위기가 불만이었는데, 어차피 선배니까. 별로 기대는 하지 않았다.
앞으로 자주 만나게 될테니 내가 잘 이끌어줘야지.
"……뭔가 이상한 생각을 하는 것 같은데. 네가 싱글싱글 웃으면 무섭다고."
"무슨 이상한 생각을 했다고 그래요? 선배야말로 제 귀여운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거 아닌가요? 으응?"
"윽, 가, 가깝다고."
은근슬쩍 거리를 좁히자 얼굴을 붉히며 물러나는 선배.
역시.
만나지 못 한 대학 1년 간, 우려할만한 사태가 일어나진 않았던 것 같다.
이거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고교때랑은 사정이 많이 달라졌으니까!
"선배, 학교 보여주세요! 여기서 가깝죠? 네?"
"가깝긴하다만…… 학교 합격했다며? 어차피 곧 다닐텐데 그 때 보면 되지 않겠냐?"
"에이, 그래도 미리 봐둬야죠. 어디가 놀기 좋은지, 어디가 분위기 좋은지 등등. 1년 먼저 다닌 선배가 안내해주세요."
"그런 걸 내가 알리가 있겠냐……"
그러면서도 어딘가로 발걸음을 옮기는 선배.
삐딱한 태도지만 부탁하는 건 대체로 들어주고, 거절도 잘 하지 않는다.
이런 그의 모습을 아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아, 그리고."
"네?"
문득 앞서가던 선배가 걸음을 멈췄다.
뭔가 싶어서 봤더니,
"대학 합격, 축하한다. 만났을 때 말했어야 했는데……."
그렇게 말했다.
아, 어쩐지 쑥쓰러워 하고 있는데.
그런 선배를 보며 나도 부끄러워지는 걸 애써 태연한 척 가장하고,
"고마워요, 선배!"
환하게 웃음만 돌려줬다.
학교는 솔직히 말하면 평범했다.
선배는 그게 당연한 거라고 그랬지만, 그래도 이제 곧 입학할 신입생이 가질 환상같은 것과는 역시, 사뭇 다르다는 점에서 조금 실망했다.
선배는 내 요청에 임시 가이드처럼 이것저것 설명해주면서 돌아다녔는데, 그게 또 즐거웠다.
설명은 별로였지만.
일단 한바퀴를 둘러보고, 마지막으로 선배가 자주 간다는 도서관이나 잠깐 들려볼까 싶어 그 방향으로 가는 도중이었다.
나와 속도를 맞춰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던 선배가 갑자기 멈추더니,
"잇시키, 잠깐만!"
"네? 앗!"
내 팔을 잡고 근처 건물 뒤쪽으로 숨듯이 데려갔다.
에, 뭐야 이거, 여기로 데려와서 어떻게 하려고요, 선배?
당황하면서도 예의 그 대사를 읊으려고 하는 순간, 선배가 나를 보고 있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선배는, 건물 그늘에서 도서관쪽에 있는 누군가를 보고 있었다.
거리가 멀어서 잘 보이지는 않은데다 사람도 꽤 있었지만.
누구를 보고 있는지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가냘픈 체구에 원피스를 입은 여자.
바람에 긴 암갈색 머리가 휘날리는 모습이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선배."
"……."
"……선배!"
"어, 아? 아아, 미안. 조금 아는 사람이 있어서. 도서관은 보류하자."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듯 선배는 여전히 붙잡고 있는 내 팔을 이끌고 오던 길을 다시 걸어갔다.
거기에 저항하지 않고 끌려가면서 다시 뒤돌아보자, 그 여자는 어느새 보이지 않았다.
누굴까?
짧은 시간이었지만, 선배가 굉장히 신경을 쓰고 있는 사람이라는 건 척 봐도 알 수 있었다.
게다가, 그 사람의 분위기는…… 그녀를 닮았다.
"저기, 잠깐만요! 멈춰봐요."
"……."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다.
뭔가 말을 해야겠는데, 말을 찾지 못하고 있는 표정.
난처함을 드러내듯, 머리만 만지고 있다.
"저기, 선배, 아까 본 그 사람……."
"……미안, 그냥 아는 사람이야. 대학와서 알게 된 사람인데, 조금 대하기가 껄끄러워서 그런거니까 말이야."
별로 그렇게 보이진 않았지만.
아까 선배의 태도는 명확히, 나와 함께 있는 걸 보이기 꺼려했던 것이다.
"그니까, 별로 말하기 싫다 이거죠?"
"뭐, 단적으로 말하면 그래."
"그럼 선배 집에 가도 돼요?"
내 말에 선배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하? 무슨 소리야. 여기서 내 집이 나올 부분이 아니잖아."
"교환조건이에요. 교환조건. 안 물어볼테니 선배 집 구경시켜 주세요. 뭔가 마실 거라도 사서."
아무런 가장도 안하고, 어찌보면 무뚝뚝하게도 들릴 수 있는 내 말에 선배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쉰다.
"……적당히 약삭빠르게 행동하는 게 오히려 편할지도 모르겠구만."
"네? 뭐라구요? 귀엽게 행동하는 쪽이 좋다고 하신건가요, 선배?"
"………."
"자, 얼른 가죠! 앗, 그래도 후배가 찾아간다고 이상한 생각 품으시면 안되는거 아시죠? 꼬시는 거엔 안넘어가니까요!"
"그러니까 안한다고……."
선배의 방은 깔끔했다.
남자 혼자 사는 방이라고 믿기지 않을만큼.
애초에 물건이 별로 없는 것 같은데, 이거.
원룸에 침대와 책상, 그리고 PC가 한쪽 구석에 있을 뿐 다른 가구는 없었다.
주방은…… 가끔 쓰는 모양인데.
"어이, 잇시키. 남의 방을 뒤지고 다니는 건 그만두라고. 봐도 재밌는 건 하나도 없으니까."
"의외로 깔끔하네요, 선배. 귀찮아서 너저분하게 살고 있을 것 같았는데."
"응? 아, 아아. 뭐, 나도 청소정도는 한다고."
확실히.
청소는 잘 되어 있는 것 같았다.
길다란 머리카락이 없나 찾아보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보이진 않는다.
선배는 어디선가 접이식 탁자를 가져와서 사온 먹을 것들을 늘어놓는다.
그래봐야 맥주와 과자정도다.
선배는 그럴거면 어딘가의 가게로 가자고 했지만 내가 이걸로 좋다고 했다. 목적은 어디까지나 선배의 방이니까.
"이런 거로 되겠냐?"
"네, 충분해요."
맥주캔을 들고,
"어, 음, 잇시키의 대학 합격을 축하하며?"
선배가 어색하게 그렇게 말한다.
"고맙습니다! 그런데 선배."
"어?"
"아까 그 사람 누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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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죽음의 기억은 강렬하다.
즐거웠던 기억, 슬펐던 기억, 행복했던 기억, 분노했던 기억, 다른 기억 모두는 시간의 흐름에 풍화되어 망각하지만, 죽음의 기억은 액면 그대로 죽을 때까지, 아니, 죽어서도 기억에 남는다.
지금에 이르러선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을만큼 먼 과거에 벌어진 사건임에도, 당시에 느꼈던 체험은 마치 영혼에 각인되어있는 듯, 쉽사리 잊을 수가 없다.
사고 자체는 평범하기 그지 없었다고 생각한다.
어딘가의 도로에서, 차도를 벗어난 트럭에 치여서 그 자리에서 죽어버렸다고 하는, 너무나도 흔해빠진 사고였다.
트럭과 부딪히는 찰나의 순간, 온 몸의 뼈를 하나하나 동강내는 듯한 지독한 고통과 함께, 내 눈에 비친 트럭 운전수의 절망적인 눈빛을 나는 똑똑히 보았다. 본인이 가해자이고, 나는 피해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눈빛은 저주와도 같이 내 기억 속에서 맴돌았다.
온 몸에서 느껴지는 지옥과 같은 고통은 잠시뿐이었고, 나는 어느새 빛이 가득한 공간에 있었다.
눈부실정도의 흰색으로 이루어진 끝없는 공간.
마치 색 자체가 빛을 내뿜고 있어서, 종교를 가지지 않은 나라도 신성하다는 느낌을 받을만큼 강렬했다.
그리고 자칭 '신'이 나타났다.
이후의 전개는 예정대로.
다하지 못 한 삶을 살게 해준다며, 원하는 곳으로 환생을 시켜준다는 제안을 받았고, 나는 흔쾌히 승낙했다.
물론 전생의 기억을 가진다는 옵션 하에.
당시의 나는 '그야말로 전생트럭이다'라면서 속으로 웃고 있었던 것 같다. 본래의 삶이 나쁜 건 아니었지만, 자극은 부족했다며, 항상 읽어오던 소설이나 만화와 같이 이세계로 전생할 수 있다면 그건 나름대로 괜찮을 거라고, 자기에게 변명하듯, 속으로 중얼거렸던 기억도 난다.
어쨌든 나는 신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신은 막힘없이 진행되는 일에 감복하며, 전생의 기억은 앞으로도 계속 유지될거라고, 그렇게 말했다. 기억을 잃는다는 건, 곧 '나'라는 고유한 개체의 종말을 의미한다. 나는 신의 배려에 고맙다고 말하며, 환생했다.
1.
'환생했다'라고 해도, 특별히 무언가를 한 건 아니지만, 어느새 나는 이제 막 태어난 듯한 신생아의 몸에 들어가 있었다. 사지가 마음먹은대로 움직이지 않고, 눈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갑갑한 몸이었다.
소리는 어렴풋하게 들렸으나, 당연하게도 모르는 언어였다.
그 뒤로 3년간.
갑갑함을 참으면서 주변의 정보에 귀를 기울이고,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최대한 파악하려고 한 결과,
여기는 이세계라는걸 확신할 수 있었다.
당장 부모의 용모부터가 일반 사람과는 달랐다.
굉장히 아름답고 귀가 긴 걸 보고 속에서 멋대로 엘프라고 부르고 있었지만, 숲에서 사는 그 종족과는 달리 평지에서 마을을 이루고 살고 있었고, 생활풍습은 인간과 다를 게 없는 듯했다.
다만, 자손이 귀한 종족인 것 같아, 아기임에도 불구하고 굉장한 대접을 받았었다.
3살이 되어 자력으로 어느정도 걸어다닐 수 있게 되자, 어머니의 눈을 피해 집 밖으로 나가 새로운 세계를 탐험했다.
모르는 말과, 모르는 자연, 모르는 풍습.
모든 것이 새로웠고, 신기했다.
당연하지만, 마법과 같은 것도 있어서, 제대로 운신이 가능해지면 저것부터 배워야겠다고 마음먹기도 했다.
결국 배우지는 못했지만.
4살이 되기 직전의 어느 날 밤.
밖이 굉장히 소란스러워, 잠에서 깬 나는 부모님이 당황한 표정으로 들어오는 걸 보고 무슨 일이 생겼다는 걸 직감했다.
창 밖에선 불이라도 났는지 밤중인데도 환했고, 여기저기서 온갖 비명소리가 들렸다.
불안이 밖으로 나타났는지, 어머니는 자신도 두려워하면서 나를 꼭 안고 있었다.
아버지는 문을 닫고 가구등으로 임시 바리케이드 같은걸 만들고 있었는데, 결과적으로 이건 악수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도 도적떼 같은 것이 마을을 침략한 게 아니었나 싶다.
닥치는대로 물건을 빼앗고 사람을 죽이고 실컷 논 도적들은 마을 전체에 불을 질러버렸고, 우리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도적들을 막기 위한 바리케이드가 도리어 우리들이 불을 피해 집 밖으로 나가는 걸 막는 장애물이 되었고, 창문으로 나가려고 해도 밖은 온통 불바다였다.
매캐한 연기와 함께 열풍이 방 안으로 몰아닥쳤다.
어머니는 계속해서 괜찮다는 말과 함께, 나를 끌어안고 있었고, 아버지는 화상을 입으면서도 창문으로 길을 터고 있었다.
나는 어머니의 품 안에서 그런 것들을 보면서, 여긴 글렀다고, 막연히 생각했다.
어린 나는 산소부족과 연기로 제대로 된 호흡을 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고, 눈 앞은 이미 일그러져 제대로 사물을 분간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적어도, 트럭에 부딪혀서 온 몸의 뼈가 조각나는 것보단 낫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정신을 잃었다.
2.
그리고 눈을 떴다.
새로운 아기의 몸인 것 같다.
신과의 대면도 없이 바로 환생한거라고, 바로 알아차렸다.
역시 제대로 떠지지 않은 눈과 어렴풋하게 들리는 귀로, 이전에 쓰던 언어와는 또 다른 언어라는 걸 알아차렸다.
지난 번에는 기존의 지식때문에 언어를 배우는 데 애를 먹었으므로, 이번에야말로 유심히 듣고 빠르게 터득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저번에는 모처럼 환생했음에도 전생의 기억을 전혀 못살렸으므로, 이번에는 확실히 살리겠다는 각오도 다지면서.
하지만 그런 각오도 무색하게, 여기서는 1년도 버티질 못했다.
아기의 몸인데다 걸어다니지도 못하는 나이였기 때문에 자세한 상황은 지금도 불명이지만, 아마도 대규모 마법의 무언가였을 것이다.
지난 번처럼 무언가 알기쉬운 소란이 나는 것도 없이 '그것'은 빠르고 정확하게 찾아왔고, 일순간 차가운 느낌이 들더니 어느새 암흑이었다.
또 다시 죽은 것이다.
아기인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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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입.
유명 투고 사이트에서 꾸물대며 연재를 하던 소설을 막 마무리 지었을 무렵이었다. 밀폐된 공간에 갇혀 영문 모를 범인이 지정하는 게임을 하며 친한 친구나 여자 친구를 죽이면서 살아남는 데스 게임류의 소설로 가벼운 마음으로 끄적거린 글이었지만, 은근히 인기를 끄는 바람에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연재를 하던 게 어언 반년, 드디어 납득이 갈 만한 결말을 생각해 내 마무리를 지어 더할나위 없는 후련한 기분을 느꼈을 그 시점에, 나는 자신을 Director라고 소개한 누군가에게 메일을 받았다.
본래라면 보지도 않고 지웠을 메일이지만, 제목부터 내가 쓰던 소설의 제목을 언급한 통에 나는 타이밍 좋게 메일을 보냈다고 생각하며 메일을 열어봤다.
처음은 의례적인 인사. 독창적인 게임 구조에 대해 감탄했다. 재밌는 소설이었다, 운운. 그러면서 그런 재능을 가진 당신에게 기회를 주고 싶다며, 언제 어디로 나와달라는 문장이 적혀있었다. 후일 다시 연락하겠다는 말도 덧붙여서.
수상하기 짝이없는 메일이기에, 일고할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런한 재능을 살릴 수 있는 기회'란 무엇일지 조금은 궁금해하는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시험기간이 다가온 탓에 나는 그런 메일을 받았다는 사실 자체를 잊어버렸다.
다시금 메일이 온 건 시험도 끝나고, 겨울방학에 들어간 시점이었다.
방학에 막 들어간 참이라 아무런 계획도 세우지 않고 집에서 빈둥거리며 보내고 있던 나는 그 메일을 받고나서 이전의 기억을 되살렸다. 이번에도 비슷한 문장이 적혀있었다. 언제 어디까지 나와줬으면 좋겠다는. 다만 이번에는 전화 번호가 적혀있었다. 아무래도 국제전화인듯, 몇 개의 번호가 더 붙어있었고 문의 사항이 있으면 이리로 연락을 주라는 말이 덧붙여져 있었다.
나는 호기심이 생겼다. 광고라고 보기엔 조악했지만, 여전히 수상쩍은 내용인건 변함없었다. 다만, '재능을 발휘할 기회'라는 그 문장이 묘하게 걸렸다.
5분쯤 고민했다.
일단 전화를 먼저 해보기로 했다.
잠깐 바깥에 나가서 공중전화를 이용할까 싶었지만, 어차피 개인정보를 그리 투철하게 보호하는 편이 아닌터라, 그냥 내 핸드폰으로 걸었다.
잠시 사이를 두더니, 여성이 전화를 받았다.
[트라하 님이신가요? 전화주셔서 감사합니다]
트라하는 내가 소설 투고 사이트에서 쓰던 필명이다. 목소리로만 들으면 20대 중반정도 될까. 나랑 비슷하거나 조금 연상인 느낌의 여성이 우리말로 기운차게 인사했다.
그리고 내가 뭔가를 말할 것도 없이 그녀는 가벼운 어조로 이것저것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요약하자면 이렇다.
자신들은 국제단체의 지원을 받아 일종의 엔터테인먼트 사업을 하는 단체이다. 사업을 위해서는 모종의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필요하며, 그들을 직원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재능이 있어보이는 사람들에게 메일을 보내 연락을 취한다. 지정된 장소로 나오면 선별과 함께 얼마간의 연수를 받고 직원이 되는데, 설령 직원이 되지 못하더라도 그 동안의 보수는 충분히 지급이 되며 최대한의 편의를 봐준다고 한다.
그리고 그녀가 언급한 보수는 일반적인 아르바이트와 비교도 안되는 액수였다. 0이 두 개정도 잘 못 붙은게 아닐까 싶을 정도의 금액을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의심하실 수도 있겠지만, 제가 드린 말씀은 전부 사실입니다. 곧 정식으로 초대장이 갈 예정이고, 지정된 장소로 나오신다면 자세한 설명을 들으실 수 있을테니 더 궁금하신 사항은 그쪽을 참고해 주세요. 초대에 응하시면 계약금이 지급되며, 그 자리에서 설명을 들으신 후 마음에 들지 않으신다면 돌아가셔도 상관없습니다. 확인을 원하신다면 계약금의 절반정도는 지금 보내드릴 수도 있습니다. 계좌를 불러주시겠어요?]
그러면서 또 대학 한 학기 등록금에 필적하는 금액을 계약금으로 불렀다. 계좌를 알려달라는 물음에 얼떨결에 알려주고 10초도 지나지 않아서, 내 핸드폰으로 입금이 됐다는 알람이 왔다. 입금된 금액은 여자가 말한 계약금의 절반.
[확인하셨나요? 트라하 님은 저희 회사에 꼭 필요한 인재입니다. 부디 초대에 응해주시길 바랍니다. 정식 초대장은 앞으로 일주일 이내에 도착할 예정이니, 만약 초대에 응하신다면 꼭 초대장에서 지시한 준비물은 지참해주세요]
이때까지도 나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제대로 인지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숨을 고르고 냉정하고 침착하게 머리를 굴려본다.
갑작스럽게 얻은 돈도 그렇고, 여자가 하는 말은 전부 어딘가 두루뭉술해서 실체를 확인하기가 힘들었다. 정확한 판단이 불가능한 상태라고, 나는 그렇게 인식했다. 하지만, 만약 여자가 하는 말이 전부 사실이라면, 굉장히 매력적인 내용임에는 분명하다. 수상쩍은 곳은 분명히 있지만, 아니, 오히려 전부 수상쩍은 내용이지만, 나는 어쩐지 여자의 말이 전부 사실이라고 느끼고 있었다. 애초에 여자의 말은 전부 거짓말이고, 범죄를 저지르기 위해 이렇게 한다고 하기엔 너무나도 번거로운 과정이다. 계약금을 쾌척하는 모양새도, '이쯤은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태도로 보인다. 여자가 말한대로 보수를 지급하는 회사라면, 그들한테 이 정도 금액을 던지는 것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겠지.
[초대에 응하실지 어떨지는 정식 초대장을 받고 고민하셔도 늦지 않습니다. 오늘 확인차 드린 금액은 저희가 트라하 님에게 보내는 자그마한 성의라고 생각해주세요. 이대로 초대에 응하시지 않으셔도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트라하 님은 반드시 오실거라고, 저희 모두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자는 확신의 찬 어조로 그렇게 말하고는, 그 때 뵙겠다고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
결국 제대로 된 정보는 무엇하나 얻지 못했지만, 나는 지극히 비일상적인 무언가를 느끼고 가슴이 술렁이고 있었다. 정식 초대장이 올 때까지 일주일이라. 나는 초대장이 도착할 동안 여자가 속한 회사에 대해 조사할 수 있을만큼 해두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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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5일 오전 9시. 나는 항구에 와있었다.
이리저리 고민을 해봤지만, 호기심쪽이 이겼기에 초대장에 적혀진 장소로 오게 된 것이다. 초대장에 적힌 준비물로는 초대장과 함께 딸려온 이상한 문양의 배지 하나만 가져오면 된다고 적혀있었기에, 나는 별다른 짐 없이 가벼운 차림이었다. 가져온 배지는 지시대로 가슴팍에 매달았다.
지정된 장소는 항구라기 보다는 그 초입부에 있는 번화가의 카페였다. 사람들의 눈이 많은 장소기 때문에 다짜고짜 납치 당할 일은 없을테니 그 점은 안심이었지만, 어쩐지 상상하고는 조금 다른 모양새에 김이 빠졌다.
카페에 들어가서 트라하 명의로 예약된 자리가 있냐고 물어보니, 입구 근처의 창가자리로 안내해줬다.
그리고 기다리길 약 5분.
정장을 빼입은 20대 중반의 여성이 카페에 들어왔다. 웨이브진 긴 머리와 선글라스가 인상적이다.
여자는 두리번 거리지도 않고 내가 앉은 자리로 오더니 두말없이 내 앞자리에 앉았다.
"안녕하세요, 트라하 님. 역시 오셨네요."
"아, 그 전화의."
"네."
주문을 받으러 온 아르바이트 생에게 녹차를 받으러 온 그녀는 들고 온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냈다.
"이쪽에 오셨다는 건 가실 생각인가요? 아니면 이야기만 들으러 오신건가요?"
"일단은 후자쪽이죠."
"후후, '일단은' 그렇겠죠. 하지만 이야기를 듣고 난 뒤엔 분명 가고 싶어지실 겁니다."
그러면서 그녀는 노트북을 조작하더니 내게 화면을 보여줬다.
CCTV 영상인듯, 칙칙한 화면이 어두운 공간을 비추고 있다.
화면이 잠시 흔들리더니, 이내 몇 명의 남녀가 둥글게 모여있는 영상으로 바뀌었다. 시간을 넘긴 것 같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모인 남녀들은 논쟁을 하고 있는 듯, 삿대질을 하거나 일어서서 달려들려고 하거나 뭔가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그런 분위기가 잠시동안 지속되더니, 또 다시 화면이 흔들린다.
그들 사이에 결론이 난듯, 다들 침울한 상태로 고개를 숙이고 있다. 원래 6명이던 사람 중 한 명이 줄어들어서 5명이 되어있다. 한 명은 어디갔을까? 라고 생각한 찰나, 화면이 바뀌어서 없어졌던 한 명을 비춘다. 또 다른 어딘가 어두운 공간에 혼자, 벽에 걸린 쇠고랑에 매달려 있는 여성의 모습. 여성이 뭔가를 소리치자, 화면은 여성이 갇힌 방의 창살 너머로 5명이 달려드는 걸 비춘다. 그들은 절박한 표정으로 여성에게 소리치며 창살에 매달려있다. 그리고 갑작스러운 암전.
영상은 그걸로 끝이었다.
……끝이었지만, 나는 어쩐지 강렬한 기시감을 느끼고 있었다. 어딘지도 모를 장소의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의 영상을 다짜고짜 보여준 이유가 있을 터. 어두운 공간, 6명의 남녀, 마치 감옥같은 독방, CCTV…….
"……!"
"아, 눈치채셨나요. 혹시 그걸로 못 알아채셨다면, '실제로 처리되는' 모습을 담은 영상도 보여드릴 생각이었는데, 잘됐네요. 아무리 원 제작자라도 그런 걸 준비없이 본다면 기분이 나빠지겠죠?"
그녀는 가벼운 어조로 노트북을 조작해 영상을 꺼버렸다.
'원 제작자'라고 그녀는 말했다.
원 제작자. 그야말로 들어맞는 말이다. 영상에서 확실한 증거는 나오질 않았지만, 어렴풋이 느끼고 있던 걸 그녀가 확인시켜준 꼴이다.
6인의 남녀가 폐쇄된 공간에서 벌이는 데스게임. 영상은 바로 얼마 전까지 내가 연재하던 소설, '시나프의 미궁'에 나왔던 설정과 똑같은 장면을 재현한 것이었다. 그녀가 말하는 '실제로 처리된다'라는 말은 이후에 이어지는 장면을 말한 것이리라. 일정한 규칙을 가지고 골라 낸 희생자를 처리하는 기계, 일 것이다.
내가 생각해내고, 내가 써낸 그 장면일 것이다.
"우선 사과의 말씀을. 트라하 님이 만들어낸 이야기가 굉장히 경제적이고 안정적인데다, 잘 '팔리는' 구성이어서 무단으로 도용해 쓴 점은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이만큼 간단한 준비물로 이러한 '이야기'를 만드는 건 정말 힘든일이어서요. 그 점에서 트라하 님이 창작물은 굉장합니다. 저희쪽 제작팀도 다들 감탄했었죠. 그래서 모셔오려고 연락을 드린겁니다."
"……그런 게임을, 실제로 만든단 말인가요?"
"네. 트라하 님은 실감이 안나실 수도 있겠지만, 꽤 큰 시장이랍니다. 돈 많은 사람들이 재미를 추구하면 정말 끝도 없죠."
"그럼 당신네들은 그런 걸 만드는 집단인가요."
"그렇게 질문하신다면 정확히는 NO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전문적으로 만드는 사람들을 저희는 디렉터Director라고 부릅니다. 저희는 그 사람들을 관리하는 쪽이죠. 보수를 지급하거나, 장치를 판매하거나, 인재를 데려오거나 하는게 저희가 하는 일입니다."
"……."
그런 식으로 장사를 하고 있다면, 전화로 말했던 막대한 금액도 이해가 된다. 돈이 썩어날 정도의 부자들이 이런 유희를 위해 마음껏 지불하는 것일테지.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유희라.
그런 소재의 매체는 지금껏 굉장히 많았고, 나부터가 그런 내용의 소설을 쓰고 있었지만 실제로 그런 일이 자행되고 있는 사실에 나는 꽤 놀라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일을 하는 집단에 대해 윤리적인 문제를 들먹이려는 마음이 내게 전혀 없다는 것에도 놀라고 있었다. 오히려, 그런 구조물을 실제로 만들어 볼 수 있다는 쪽에 더 신경이 쓰였다. 아무리봐도 정상적인 반응은 아니라고, 나도 인식하고 있지만…….
"고민하고 계신가요?"
그녀가 문득 그렇게 물었다.
"무슨 고민인지 맞춰볼까요? 사람이 사람을 죽여도 될까……라는 고민은 아닌 건 확실하고, 음~ 의외로 놀라지 않는 자신에 대해 고민하고 있죠?"
"……."
"정답인가보네요. 걱정마세요. 저희가 사람을 보는 눈은 정확하답니다. 트라하 님은 소질과 적성이 있기에 저희가 연락을 드린겁니다. 당신은 저희와 같이 일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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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이 소리없는 비명을 지른다.
검은색의 촉수를 사방으로 뻗으며 닥치는대로 주변을 뭉개는 부정형의 거대한 생물체. 민가 두 세개 정도의 크기가 꿈틀대는 모습은 생리적인 혐오감을 불러일으켰다.
주변이 나무만 몇 그루 있을뿐인 평야지대여서 다행이라고, 트라하는 생각했다.
"저거냐?"
트라하가 말하며 옆을 보니, 시스는 백색을 기조로 한 다소 노출도가 높은 복장으로 어느새 바꿔입고 있었다. 처음 집무실에서 만났을 때의 그 모습이다.
시스는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세계의 일그러짐으로 인해 발생하는 일종의 부정不正이야. 편의상 요수라고 부르는데…… 저기, 이런 설명하고 있을 때가 아닌데, 빨리 해치워야지! 너만 도와주면 내가 해치울 수 있어. 계약만 하면……."
"잠깐만 기다려 봐라. 실험해볼게 있다. 분명 계약자가 아니면 제대로 상대할 수 없다고 했지?"
"그…그건 아니지만, 제대로 상대하려면 나랑 정식으로 계약을 해서, 힘을 이끌어 내야해."
주저하는 태도로 시스가 그렇게 말했지만, 트라하는 그걸 '계약을 하지 않아도 어떻게든 되긴 한다.'로 받아들였다.
"아이네!"
"네."
트라하가 다가오는 괴물을 보면서 소리치자 뒤에 대기하던 부관, 아이네가 소리도 없이 다가와 대답했다. 물색의 풍성한 머리카락 사이로 가라앉은 눈동자가 보인다.
"가용인원은?"
"현재 소집인원은 총 300명. 지금 당장 없어져도 지장이 없는 수준까지 끌어모아서 데려왔습니다."
"구성원은?"
"기사 5명, 준기사 10명, 나머지는 일반 사병입니다."
아이네가 담담한 어조로 보고했다.
기사 5명이면 마물 부락 하나 정도는 가볍게 정리할만한 인력이다. 준기사는 물론, 일반 사병도 통상적인 군대의 사병보단 훨씬 훈련이 잘 되어있는 상태다. 이 정도의 부대로 저 괴물을 얼마만큼 상대할 수 있을까. 트라하는 그걸 알아보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었다.
트라하와 아이네가 나누는 대화를 옆에서 잠자코 지켜보던 시스는 불안한 표정으로 트라하에게 말했다.
"저기, 무슨 얘기한거야? 저 사람들은 왜 데려온거야?"
"저건 내 사병이다. 개인적으로 데려온 병사들이야. 죽어도 별 상관은 없지."
"죽, 죽다니?"
얼굴이 새파랗게 변한 시스는 무시하고, 트라하는 아이네에게 병사들을 보내라고 손짓했다.
"전원, 대형 맞춰서 돌격! 상세 지시는 각 분대의 기사에게 맡긴다."
아이네가 조용한 목소리로 그렇게 소리치자, 기사들이 각 분대를 이끌고 괴물을 향해 달려간다. 별다른 함성과 고함도 없이, 조용한 전진이었다.
"저도 참전해도 되겠습니까?"
"아니, 넌 그대로 있어. '일반적인 수준'의 병사들로 어디까지 상대가 가능한가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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