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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문

` 2016년 7월 28일

칼리리 2016. 7. 29. 00:04



 -




 0.


 입이 바짝바짝 타들어간다.

 마우스를 쥔 손은 덜덜 떨리며 달그닥거리는 소음을 내고있다.

 올 상반기 마지막 카드.

 많은 예산이 들어간 대규모 타이틀로 후속작 또한 예정되어 있다. 붙기만 한다면 최악의 경우에도 5년은 편히 지낼 수 있는 것이다.

 통상의 타이틀에서 내가 들어갈 수 있는 직군의 채용인원이 고작 1명임에 비해, 이 타이틀은 무려 3명! 최종면접에서 다소 버벅댄 것 같긴 하지만 괜찮다. 면접관들도 '아, 신리 씨라면 정말 잘 어울리겠네요.' '근무스케쥴이 조금 빡빡해도 괜찮을라나? 앞으로 약속같은 것도 정리해두라고.' 등등 청신호롤 보내왔으니까 말이야. 당시의 분위기로만 봐서는 다른 지원자들이 나를 내정자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할 수 있다, 신리. 붙는다, 붙는다! 절대로 붙는다!

 나는 마우스를 클릭했다.


 1.


 [올 하반기에도 극심한 취업난이 예상되는 가운데, 몇 개의 대형 라인이 제작에 들어갈 타이틀 수를 줄이겠다는 계획을 일제히 발표했습니다. 이에 전문가들은 대형 타이틀이 아닌 중소형 타이틀에도 눈을 돌려야 한다는......]


 "하겠냐, 그런 곳."


 나는 TV를 껐다.

 오늘부터 하반기 채용이 시작된다.

 상반기 마지막, 최종에서 탈락의 고배를 마신 후, 약 3개월 가량을 죽은 채로 보내버렸기 때문에 나의 스테이터스는 상반기와 다를 게 없다.

 하지만!

 마음가짐은 확연히 다르다.

 첫 준비였던 지난 번과는 달리 절실함과 간절함이 내장되어 있는 것이다.

 당장 취업에 성공하지 못하면 한 달 뒤의 식단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상황에 처한 나의 간절함을 면접관들이 알아줬으면 좋겠다.

 물론, 그러기 위해선 일단 서류부터 통과해야겠지만.


 옷을 주섬주섬 챙기고 집을 나선다.

 얼마만의 외출인지. 최소 한 달은 집에 박혀 있었던 것 같다. 햇빛이 눈부시다.

 원래대로라면 머리를 싸매며 서류를 작성할 예정이었으나, 오랜만에 대학 친구에게 연락이 왔기 때문에 일정을 수정했다.

 그녀석도 상반기를 말아먹었으니, 이번에 다시 노릴 터.

 피차 급한 상황이지만, 모처럼의 만남이고 정보도 얻을 겸 만나기로 했다.

 나와는 다르게 발이 넓은 애니 이미 취직에 성공한 선배들로부터 무언가 들었을 지도 모른다.


 10대 대학이 모여있는 중앙지구 대로로 나왔다. 아직은 속편해 보이는 얼굴로 하하호호 떠드는 대학생들과 척 보기에도 피곤에 찌들어있는 취업 준비생들이 넘쳐흐른다.

 후자의 대부분은 100m정도의 길이로 만들어놓은 채용 공고판을 심각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다.

 나는 인터넷에 뜨는 공고로 확인하는 편이지만... 온 김에 가볼까.

 공고판은 대형 타이틀과 중소형 타이틀로 구분되어 있었다.

 아까 본 뉴스의 아나운서가 말하던 게 문득 생각났다.

 중소형 공고판의 라인은 대부분 처음 들어보는 것들이었다. 가끔 들어본 것이 있나 싶으면, 대형 라인의 자회사였다.

 뭐,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

 내용을 본다.


 [타이틀    : 촉수와 냥냥하는 여동생 때문에 내가 곤란하다(가제)

  모집부문 : 여동생 (0명)

                 선생님 (0명) (서브)

                 동급생 (0명) (서브)

  기간       : 약 6개월

  상세 내용은 당사의 홈페이지 참고할 것. 상기 고지된 내용은 회사 사정으로 인해 바뀔 수 있습니다.

  유사 계열 타이틀 유경험자, 츤데레 자격증 보유자는 우대합니다]


 [타이틀    : 얼음의 임신 출장 2

  모집부문 : 유부녀 (0명)

                  OL (0명)

  기간       : 미정

  이전 타이틀 출연자는 제외합니다. 상세한 내용은 당사의 홈페이지 참고할 것]


 [타이틀    : 마법여동생 에이브릴 3

  모집부문 : 여동생 (0명)

  기간       : 약 6개월

  급여       : 협의

  당사 홈페이지의 채용 공고 확인 요망. 후속작 제작이 확실시되므로 기간 연장의 가능성 있음.

  유경험자 우대]


 ......

 이런 식의 공고가 이십 개 정도 붙어있었다.

 하나같이 기간이 짧고, 상세내용이 적혀있지 않은 것이 수상쩍다. 개중에는 유명한 타이틀의 속편인 것도 몇 개 보이긴 했는데, 이런 것들은 채용자를 사정없이 굴리는 타이틀로 악담이 자자하다. 급여도 형편없고, 좋다고 들어가면 바로 사축행인 것이다.

 그럼에도 중소형 공고판 앞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북적이고 있다. 전부 퀭한 눈에 머리카락도 푸석푸석한 게 장기 취업준비생이 분명하다. 절박하니까 뭐든 붙고보자는 심정일까.

 아무리 절박하다고 해도 이런 타이틀에 지원하고 싶지는 않다. 내용을 폄하하는 건 아니지만, 장래의 이미지도 고려해보면 첫 직장으로는 적합하지 않다는 게 내 생각이다. 이런 작품들은 소위 언더라고 불리는데, 언더에서 오버로 가기가 얼마나 힘든지에 대해서는 더 말할 필요가 없겠지. 오버에서도 더 위가 있긴 하지만, 어쨌든.

 아무튼 일단 한 번 경력을 쌓으면, 두 번째 이후로는 꽤 수월하니 어떻게든 첫 직장은 괜찮은 타이틀을 골라서 가고 싶다. 당장 지금을 보고 미래의 가능성을 버리고 싶진 않은 것이다.

 뭐, 누구는 배부른 소리라고 그럴지도 모르겠다.


 "배부른 소리네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루가 파르페를 퍼먹으며 그렇게 말했다.

 장소는 남동지구의 한 카페. 온갖 종류의 음식점과 술집이 모인 남동지구에서도 인기순위로 따지자면 세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초 유명 카페다.

 사람 많은 곳을 싫어하는 나로서는 이런 곳에 오고 싶지 않았지만 루의 '마지막으로 사치를 부리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요. 마지막으로.'라는 말에 대꾸할 말이 없었다. 누가보면 죽을병이라도 걸린 줄 알겠다.


 "그런 소리 말고 솔직히 생각해봐. 너도 그런 곳에 가고 싶진 않잖아?"

 "물론 그렇죠. 하지만 가고 싶은 곳만 고집하다간 아사할지도 몰라요. 농담이 아니라구요."

 "......"


 농담이 아니긴 하다.


 "지금이야 대학에서 나오는 지원금으로 생활비를 대고 간신히 남는 돈으로 먹을 것을 고를 여유가 있지만, 지원금이 끊기는 내년에는? 과연 그런 소리가 나올까요. 밥이 걸려 있으면 사람은 굉장해지는 법이죠. 무서워진다구요. 내가 나같지 않은 그런 자아붕괴의 상황이 온다구요."


 루가 공허한 눈빛으로 그렇게 중얼거린다. 상반기에 집세가 올라서 힘들었던 시기가 있었다고 하더니, 그 때의 경험인가보다. 무섭다.


 "어, 어쨌든. 내년 상반기에는 몰라도, 지금은 최대한 넣고 싶은 곳만 넣어볼래. 기껏 좋은 대학도 나왔는데, 살리지 못하는 건 아쉽잖아? 게다가 중소형 타이틀은 소꿉친구쪽은 잘 뽑지도 않던데. 여동생은 물론 강세였지만."

 "그건 그래요. 이번엔 저도 그럴 생각이고요. 그보다... 역시 강한가요, 여동생. 이 길을 택한 것에 대해 후회는 하지 않지만, 그런 경향은 조금 부러울 때가 있네요."


 루가 힘없이 그렇게 말했다.

 여동생이라고 하면 세상 모든 증오를 담아서, '하아? 그렇게 오빠, 오빠! 소리치면서 앵겨들기만 하고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은 채, 소비 트렌드에 맞춰서 단순히 스테이터스만 채운 그런 녀석들이 되라고 하시는건가요, 저한테?'라고 말하던 루가 저렇게 말할 정도니 상황이 심각하긴 하다.

 루는 척 보기에도 작은 체구에 조신한 성격이라 주위에서 전부 여동생을 전공하는 대학으로 갈 것을 추천했지만, 그 모두에게 저런 대사를 날리며 나와 같이 소꿉친구를 전공하는 대학으로 왔다.

 특출난 특색이 없는 나로서는 소꿉친구 계열이 갈 수 있는 최대한이었는데, 루의 경우는 그런 게 아니니 조금 아쉬울지도. 성적도 충분히 됐을텐데.

 소꿉친구도 전통의 강자로서 대대로 많은 취직자들을 배출해냈지만, 최근의 트렌드에는 조금 밀리는 경향이 있는 건 사실이다. 소꿉친구 밑으로 여동생과 누나의 트로이카로 칭송받던 시절에 비해 현재는 여동생에게 최고 자리를 내준 모양새니까.

 그만큼 여동생은 강세니까 말이지. 언더고 오버고 그보다 위라는 전설의 빛의 세계에서도 여동생은 강세다.


 "강세여도 시장 전체적으로 불황이라 여동생 계열 애들도 힘들다고 하던데."

 "걔네도 그런데 우리는 어떻겠어요. 조금 더 힘내야죠."

 "그래야지."

 "그래서 어디로 넣을건가요? 공고는 봤겠죠?"


 보기는 봤는데... 일단 최우선으로 생각해둔 건 일단 3개.

 하나는 장수 시리즈로 지금까지 파생작품을 포함하여 스무개가 넘는 타이틀을 낸 초유명작품이다.  소꿉친구에 대해 처우가 좋지 않다는 소문이 있기는 하지만, 일은 별로 시키지 않고 급여는 똑같이 준다는 점에서 최고의 직장. 게다가 파생작품을 워낙 많이 내기 때문에 한번 붙으면 장기적으로 안정된 생활이 가능하다. 물론 경쟁률은 말도 못하게 높다.

 다음은 라인의 인지도만 따지면 최고 수준인 곳의 타이틀. 타이틀 당 소꿉친구 하나씩은 꼭 넣는 곳으로 이번에도 2-3명 정도 뽑을 거라고 예상이 되고 있는 상태. 상세공고는 나중에 나온다지만, 라인의 인지도와 더불어 그 라인을 맹신하는 시장의 경향을 보았을 때, 타이틀은 반드시 성공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경쟁률은 당연히 높다.

 마지막도 인지도는 최고 수준. 소꿉친구의 채용 규모는 불확실한데다 워낙 과작을 하는 곳이라 정보 또한 거의 없는 상태. 이번엔 기적적으로 채용 공고가 떴다. 계열 구분없이 통채로 00명 정도를 뽑는다고 한다. 위에 언급한 회사처럼 나온 타이틀은 반드시 성공한다. 그리고 반드시 롱런한다. 확률은 절망적이지만, 좋은 기회이니만큼 지원해보고 싶다.


 나는 이러한 내용을 루에게 말했다.


 "배가 불렀네요. 지금 처한 상황을 이해한건가요? 하나같이 메이저한 라인에 메이저한 타이틀이잖아요. 이런 건 각종 자격증과 서브 경험이 출중한 애들만 붙는 곳이라구요."

 "이것만 넣는다는 건 아니니까 말이야. 다른 것도 넣을거라고."

 "...신리도 알아서 잘 하겠지만, 전 좀 걱정이네요."

 "그럼 이번에도 취업에 성공하지 못하면, 일자리나 알아봐 줘."

 "제가 무슨 인맥이 있어서요?"


 루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묻는다.


 "이번에 열심히 해서 꼭 붙을테니까 걱정하지 말라는 소리."

 "알겠어요. 저도 이번에 성공하테니까, 신리도 힘내요."

 "응."


 2.


 루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왔다. 마지막 사치라는 파르페도 실컷 먹었고, 더 이상 미련이 없다.

 남은 건 취업 준비로 하반기를 불태울뿐이다.

 우선은 서류부터.

 대학에 다니는 동안 매일같이 수업에 치여서 살다보니 이렇다 할 경력도, 활동도 없는 내가 서류에서 비빌 언덕이라고는 자기소개서밖에 없다.

 일단 서류를 통과하려면 채용담당다를 홀릴만큼 멋진 자소서를 쓰는 수밖에.


 지원사이트에 들어가서 채용지원을 누르고 기본사항을 입력하고, 자소서 항목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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