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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년 8월 26일

칼리리 2018. 8. 27. 01:01






0.


 "─────!"


 괴물이 소리없는 비명을 지른다.

 검은색의 촉수를 사방으로 뻗으며 닥치는대로 주변을 뭉개는 부정형의 거대한 생물체. 민가 두 세개 정도의 크기가 꿈틀대는 모습은 생리적인 혐오감을 불러일으켰다.

 주변이 나무만 몇 그루 있을뿐인 평야지대여서 다행이라고, 트라하는 생각했다.


 "저거냐?"


 트라하가 말하며 옆을 보니, 시스는 백색을 기조로 한 다소 노출도가 높은 복장으로 어느새 바꿔입고 있었다. 처음 집무실에서 만났을 때의 그 모습이다. 

 시스는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세계의 일그러짐으로 인해 발생하는 일종의 부정不正이야. 편의상 요수라고 부르는데…… 저기, 이런 설명하고 있을 때가 아닌데, 빨리 해치워야지! 너만 도와주면 내가 해치울 수 있어. 계약만 하면……."

 "잠깐만 기다려 봐. 실험해볼게 있다. 분명 계약자가 아니면 제대로 상대할 수 없다고 했지?"

 "그…그건 아니지만, 제대로 상대하려면 나랑 정식으로 계약을 해서, 힘을 이끌어 내야해."

 

 주저하는 태도로 시스가 그렇게 말했지만, 트라하는 그걸 '계약을 하지 않아도 어떻게든 되긴 한다.'로 받아들였다.

 

 "아이네!"

 "네."

 

 트라하가 다가오는 괴물을 보면서 소리치자 뒤에 대기하던 부관, 아이네가 소리도 없이 다가와 대답했다. 물색의 풍성한 머리카락 사이로 가라앉은 눈동자가 보인다. 


 "가용인원은?"

 "현재 소집인원은 총 300명. 지금 당장 없어져도 지장이 없는 수준까지 끌어모아서 데려왔습니다."

 "구성원은?"

 "기사 5명, 준기사 10명, 나머지는 일반 사병입니다."


 아이네가 담담한 어조로 보고했다. 

 기사 5명이면 마물 부락 하나 정도는 가볍게 정리할만한 인력이다. 준기사는 물론, 일반 사병도 통상적인 군대의 사병보단 훨씬 훈련이 잘 되어있는 상태다. 이 정도의 부대로 저 괴물을 얼마만큼 상대할 수 있을까. 트라하는 그걸 알아보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었다.

 트라하와 아이네가 나누는 대화를 옆에서 잠자코 지켜보던 시스는 불안한 표정으로 트라하에게 말했다.


 "저기, 무슨 얘기한거야? 저 사람들은 왜 데려온거야?"

 "저건 내 사병이다. 개인적으로 데려온 병사들이야. 죽어도 별 상관은 없지."

 "죽, 죽다니?"


 얼굴이 새파랗게 변한 시스는 무시하고, 트라하는 아이네에게 병사들을 보내라고 손짓했다.


 "전원, 대형 맞춰서 돌격! 상세 지시는 각 분대의 기사에게 맡긴다."


 아이네가 조용한 목소리로 그렇게 소리치자, 기사들이 각 분대를 이끌고 괴물을 향해 달려간다. 별다른 함성과 고함도 없이, 조용한 전진이었다.


 "저도 참전해도 되겠습니까?"

 "아니, 넌 그대로 있어. '일반적인 수준'의 병사들로 어디까지 상대가 가능한가 봐야겠다."

 "알겠습니다."
 
 다섯 개로 나뉘어진 분대는 역할 분담이 확실하게 된 듯, 두 패로 나누어졌다. 먼저 다가서는 두 개의 분대는 사람 하나 정도 크기의 대형 방패를 들고 천천히 괴물에게 다가선다. 

 "─────!!!"

 그들을 눈치 챈 괴물이 재차 비명을 지르며, 촉수를 휘두른다. 지금껏 요란하게 주변을 뭉개왔던 검은 촉수는 병사들이 쌓아올린 대형 방패에 크게 부딪혀서, 소리없이 정지했다.

 "마도방패인가."
 "네. 얼마전에 대형 마물용으로 보급된 방패입니다."

 자세히 보니 진을 갖추어 내민 방패 앞에 푸른 빛이 보인다. 그렇게 종횡무진으로 휘두르던 촉수는 그 방패에 소리도 없이 막혀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었다. 
 같이 방패를 든 다른 분대가 또 다른 촉수를 막았다. 이번엔 두 개를 동시에 저지한다. 뒤로 밀려간 병사도 있었지만, 어떻게든 저지에 성공한 것을 보고, 남은 세 개의 분대가 괴물의 뒤를 노린다.
 마력을 담은 칼날을 내지르는 세 명의 기사를 중심으로, 나머지 병사들이 창을 내찌른다. 

 "────!!"

 소리로 이루어지지 않는 비명. 재차 촉수를 휘두르지만, 어느 새 위치를 바꾼 방패분대가 휘두르는 촉수를 막아선다.
 그리고 다시 공격. 
 검은색 형체가 뭉텅이로 잘리며, 촉수를 움직이는 기세도 약해진다.
 점점 공격은 가열차게 진행되고, 그 사이에 대열이 흐트러져 몇 명이 촉수에 맞기도 했지만, 누가봐도 괴물은 죽어가고 있었다.
 끝났다, 고 트라하는 생각했다.

 "……아."
 
 문득 시스가 소리를 냈다. 
 동시에, 괴물이 빛났다.
 
 "!!!!!!"

 비명과 함께 빛이 터지고, 트라하는 고개를 돌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괴물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전멸이군."
 "확인해보고 오겠습니다."

 명백하게 우세를 점하던 300명의 병사 태반이 피를 흘리며 죽어있었다. 
 마지막에 괴물이 빛나던 건 폭발하는 것 같았지만, 폭발이라고 하기엔 대부분 멀쩡히 사지가 붙어있었다. 
 폭발보다는 마치,

 "……요수는 죽기 전에 바늘처럼 촉수를 주변에 내찌른 뒤에 사라져버려. 그거에 당한 거야."
 
 시스가 울음을 참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과연. 
 피투성이의 신체 사이로, 자그마한 원형으로 구멍이 나있는 것이 보인다. 촉수도 거뜬히 막아냈던 마도 방패도, 대량의 구멍이 뚫려있다.
 아이네가 빠르게 확인을 끝내고 돌아왔다.

 "전멸입니다. 무수히 많은, 소형의 촉수로 인한 공격 같습니다."
 "그래. 아이네는 먼저 돌아가서 후속 처리를 시작해."
 "네. ……하지만, 호위도 없이 돌아올 때 위험하지 않으실지."
 
 아이네의 말에 트라하는 적당히 손을 흔들며 괜찮다는 신호를 보냈다. 아이네는 알았다는듯, 고개를 끄덕이고 묶어둔 말을 타고 교도로 달려갔다.
 그런 일련의 대화가 이루어지는 동안, 시스는 계속 울 것 같은 얼굴로 병사들이 죽어있는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와 네가 계약하면, 너는 저 괴물을 상처없이 이길 수 있는건가?"
 "……상처없이, 까지는 아니더라도 저렇게 무의미하게 희생당하는 사람은 없을 거야."
 
 미움섞인 시스의 말에 트라하는 한숨을 쉬었다.
 
 "방금 건 무의미하지 않았어. 적어도, 300명 정도의 잘 훈련된 병사가 있다면, 죽기 직전까지는 몰아넣는 게 가능하다는 게 실증됐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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