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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9월 3일

칼리리 2016. 9. 6. 00:31


 -


 

 "……."


 눈을 떠 보니 여느 때의 봉사부 부실이었다…… 만, 평소와는 다른 풍경이었다.

 유키노시타가 언제나 앉아있던 자리에는 검은 후드를 깊게 눌러 쓴 작은 체구의 인물이 앉아있고, 웬일인지 부실에서 보기 힘든 얼굴들이 다른 한 쪽에 모여있다. 

 대충 봐도, 원래 멤버인 유키노시타와 유이가하마, 그리고 이쯤되면 그냥 준 봉사부원이 아닌가 싶은 잇시키를 비롯해서 카와사키, 하루노씨, 히라츠카 선생님에 어째선지 코마치도 있었고, 도저히 영문을 알 수 없지만 시로메구리 선배나 오리모토나 사가미, 미우라와 에비나도 있다.

 ……무슨 상황이야, 이건?

 모여 있는 면면들은 어째선지 쥐죽은 듯 조용히 하고 있는데, 침착하지 못한 태도로 몰려있는 모습에서 불온한 기색이 느껴진다.

 

 "……모두, 정숙해주세요. 지금부터 시작할거니까요."


 후드의 인물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뭔가 시작되려나 보다.

 아니, 그보다…….


 "그 목소리……, 너 루미루미냐?"

 "……읏, 조용히 하세요. 히키가야 하치만. 나는 루미루미따위가 아닙니다."

 

 명백하게 당황하고 있으면서 뭘 아니라는 거야.

 뭔가 일신상의 사정이 있는지, 루미루미는 고개를 연신 내저으며 부정하고 있다.

 뭐, 좋다. 


 "그럼 후드녀. 뭘 하고 있는거야, 이건."

 "모르겠나요, 히키가야 하치만.……. 이건 당신이 지은 업보를 심판하기 위한 자리. 당신의 그 우유부단함에 지친 그녀들의 희망을 받아 제가 이 자리를 주선했습니다. 공정하고 객관적인 판단을 제가 내릴테니, 히키가야 하치만, 당신은 그 자리에서 잠자코 지켜보기나 하세요."


 우유부단함이라니……. 프로 외톨이에게 '자신의 의견을 가지지 않는다'는 결단력은 필수 사항이다. 우유부단함을 발휘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고.

그런 나를 무슨 어딘가의 청춘 러브코메디 주인공처럼 말하다니.


 "……이제와서 무슨 소리입니까. 당신이 주인공이 아니면 대체 누가 주인공이냐구요."

 "에, 그런거야?"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조용히 좀 하세요."


 루미는 단호한 어조로 그렇게 말했다.

 그렇게까지 말을 해오는데, 여기서 더 떠들기엔 내 공기를 읽는 능력이 너무 뛰어나다.

 나와 루미루미가 이렇게 대화하는 와중에도, 내 뒤쪽에 몰려있는 여성진에게서 정체모를 압력을 느낀다.

 ……영압이냐? 영압인거냐?


 "크흠, 조금 방해가 들어왔지만, 예정대로 진행하도록 하죠. 우선, 히로인 넘버 001. 유키노시타 유키노, 앞으로."

 "……."


 유키노시타가 여전히 얼음장 같은 미모를 자랑하며 교실 중앙으로 나온다.


 "……그보다, 유키노시타 너도 이런 상황에 순응하는거냐……."

 "조용히 해줄래, 히키가야 군? 이게 다 네가 제대로 된 태도를 취하지 않아서 그런 거야. 애초에 가장 처음으로 만난 히로인을 방치하고 다른 여자애에게 눈을 돌릴 수 있는지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렵네. 1권 표지모델이자 검은 머리인 히로인이 진히로인이라는 건 만고불변의 진리잖니?"

 

 그건 얼마 전에 친구가 없는 모 소설에서 깨졌다만……. 그리고 갑자기 메타 발언이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잖아.

 게다가 유키노시타의 그 말에 반론이라도 하듯 저 뒤에서 '가장 먼저 만난 히로인은 나다, 히키가야. 게다가 나도 검은 머리다! 나를 잊지 말아줘!' 라고 말하는 독신 여교사의 목소리도 들려오는 바람에, 나는 대답할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조용히! 평가 대상자는 앞으로 불필요한 말을 하지 마세요. 히키가야 하치만은 물론 외야의 히로인 후보군도 제발 조용히."

 

 루미가 화를 내며 말한다. 

 평상시의 유키노시타라면 당연히 반발했을 타이밍이지만, 지금은 그 말에 따르듯 눈을 감고 조용히 서 있다. 

 ……저쪽은 히로인 후보군이었나. 백보 양보해서 나와 교류가 있는 편인 카와사키까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그 뒤쪽의 라인업은 이해의 영역을 뛰어넘었다. 사가미나 미우라는 대체 뭐냐고.


 "유키노시타 유키노. 당신은 당신이야말로 진히로인에 어울리는 캐릭터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맞습니까?"

 "당연한 말을."

 

 뒤쪽의 여성진에서 음울한 기운이 늘어나는 게 느껴진다. 유키노시타의 주장에 반대하는 사람이 많은 모양이다.

 애초에 진히로인이라는 게 뭐야. 내가 진짜 주인공이면 내가 고르는 사람이 진히로인인 거 아니냐고.

 어째서 루미가 그걸 판단하는 거냐.

 

 "1권의 표지모델. 사실상 가장 최초로 만난 히로인. 히키가야 하치만이 먼저 친구가 되지 않겠냐고 제의할 정도의 사이. 외모는 말해봐야 입이 아플 정도……. 확실히 이 정도 모여있으면 진히로인이라고 보지 않을 수도 없을 정도입니다만, 과연 그럴까요?"

 "……?"
 

 루미는 눈을 치켜뜨는 유키노시타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하기 시작했다.


 "대화의 거의 절반 정도는 히키가야 하치만의 멘탈이 바스라질 정도의 매도뿐이고, 나머지 절반도 도대체 영문을 알 수 없는 두루뭉실한 뜬구름 잡는 대화일 뿐. 도대체 뭘 하고 싶은 건가요 당신은? 매번 그렇게 매도를 당하면 천 년의 사랑도 식어버릴텐데. 조금 예쁘게 생겼다고 너무 자만하는 게 아닙니까? 히키가야 하치만이 마조히스트가 아니었다면 진작에 봉사부를 나갔을 겁니다. 이해하고 있습니까?"

 "뭐, 아, 아니 잠깐만……, 나, 나는 그럴려던게……."


 굉장하다. 그 유키노시타가 당황하고 있다.

 나는 마조히스트가 아니라고 반론하려 했지만, 유키노시타의 당황하는 모습을 보니 그런 생각은 싸그리 날아가버렸다.

 굉장하잖아, 루미루미! 유키노시타를 저렇게 당황하게 한 사람은 여성 중에는 거의 최초인 것 같은데.

 게다가 평소의 내 생활도 잘 이해하고 있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유키노시타의 매도는 일상생활로 자리잡힌 수준이라 아무렇지도 않지만.


 "매도는 그렇다 치더라도, 도무지 뭘 말하고 싶은 건지 모를 정도의 대화가 너무 많습니다. 혼자 멋대로 기대하다가 멋대로 실망해놓고선, 금세 태도를 바꿔서 '언젠가 나를 구해줘.'라고 말하지를 않나. 그런가 하면 결국 명확한 얘기는 하나도 없지 않습니까.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얘기가 없었고. 이래서야 히키가야 하치만은 고사하고 독자도 지쳐서 반감만 사게 된다고요. 알겠습니까?"

 "……나, 난 정말……."

 "그렇게 쨍한 태도를 취하다가 정말 가-끔 있는 이벤트 하나에 홀라당 넘어가는 히키가야 하치만도 문제입니다. 이야기 시작부터 계속해서 대쉬해오던 유이가하마 유이가 그걸 보고 얼마나 속으로 욕을 했을까요. 어디의 모 캐릭터 같았으면 진작에 칼부림이 났을 겁니다. 안그런가요, 유이가하마 유이!?"

 "에? 나, 나? 으응, 어, 어떨까나……." 


 식은땀을 흘리는 유키노시타를 공격하던 화살이 갑자기 유이가하마에게 넘어갔다.

 말할 수 있는거냐……. 하도 조용하길래 입이라도 막아둔 건 줄 알았다고.


 "보세요, 유키노시타 유키노. 주위의 눈치를 살피는 것과 가슴의 크기만이 장점인 그 유이가하마 유이가 제대로 '아니'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걸 보면, 사태의 심각성을 알겠습니까? 애초에 주인공에게 친절하지 않은 히로인은 대세가 되지 못하니까요. 시대는 힐링과 안전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 그렇지만, 나, 난 코노라노 캐릭터 순위에서도 1위 한 적도 있었고…… 다른 캐릭터들보단 인기가 있는 건 확실한 사실이잖니? 지, 지금까지 그러한 태도를 히키가야 군에게 취한 것은 부정하지 않겠지만, 앞으로는 발전 가능성이 있달까, 오히려 그렇게 했는데도 1위를 한 것을 보면 역시 대단하다고 할까……."


 ……유키노시타의 말이 지리멸렬하다. 


 "그런가요. 당신의 생각은 알았습니다. 적어도 1권 시점에서 보이던 그런 자뻑캐릭터를 계속 밀고 나갔어도 지금의 간만 보는 캐릭터성 보단 나았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계속 그렇게 자신만의 세계에서 완결을 짓도록 하세요. 그리고 캐릭터 순위가 아무 의미도 없다는 건 치바의 모 여동생이 증명했습니다. 이상."

 "아, 자, 잠깐! 아직 내, 얘기는……."


 루미루미가 이상, 이라고 말한 순간 어디선가 검은 후드들이 튀어나오더니 유키노시타를 교실 구석으로 몰아갔다.

 유키노시타는 뭔가 말하려고 했지만, 교실 구석의 '히로인 후보군'이 모인 자리로 몰아가니 입을 다물어 버렸다.

 ……아니, 주위의 압력 때문에 입을 열지 못하는 것 뿐인가.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엄청난 피로가 몰려왔다.


 "알겠나요, 히키가야 하치만? 솔직하지 못하고 매도만 해대는 히로인은 아무리 검은 머리에 1권 표지를 장식한다 하더라도 진히로인이 될 수 없는 겁니다. 이상의 이유로 유키노시타 유키노는 부적격입니다."

 "……."


 루미루미의 가차없는 소리를 들으며, 얘가 원래 이런 캐릭터였나 잠시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느샌가 유이가하마가 교실 중앙에 나와있다.


 "유, 유키농 다음은 나지? 내가 002번일거야, 맞지?"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고, 유이가하마.


 "흥, 잘 알고 있군요. 히로인 넘버 002 유이가하마 유이."

 "으,응……. 얼른 시작해 줘."

 

 뭔가 긴장한 모양새지만, 아까보다는 당차게 말했다.

 하지만, 루미는 가차없었다.


 "아까 말했다시피 평가 대상자에게 불필요한 말을 꺼낼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해 바로 시작하도록 하죠. ……유이가하마 유이, 흠, 유키노시타 유키노에 비하면 여러모로 좀 부족하군요. 외모는 물론 세간에선 높이 쳐줄 만 하지만, 유키노시타 유키노에겐 한 수 접어주고, 능력은 물론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상황……. 히키가야 하치만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1권부터 줄기차게 어필을 했지만, 유키노시타 유키노의 뜬구름 잡는 말 한마디보다 못한, 그야말로 호라모젠젠의 전형. 이기는 거라곤 주위의 눈치를 살피는 정도의 능력과 가슴의 크기군요."

 "……우, 우우……."


 신랄하기 짝이 없는 루미의 말을 듣고 유이가하마의 표정이 급격하게 어두워지더니 울먹이기 시작했다.

 

 "잠깐, 가슴의 크기는 지금은 지고 있을 지 몰라도, 향후에는 내가 이길 가능성도 있으니, 보류가 맞지 않을까?"

 

 조용하던 유키노시타가 발끈하며 그렇게 소리쳤다. 뭐, 하루노 씨를 보면, 그럴 가능성이 없다고는 못하겠지만…….

 

 "조용히 하세요, 유키노시타 유키노. 한 번만 더 말하면 재갈을 물리겠어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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