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그만해, 그런 거 본문

후보

2. 그만해, 그런 거

칼리리 2017. 11. 28. 00:09




 - 그만해, 그런 거.


 

 

 "일찍이…… 세계의 뒤에서, 고독하게 인류를 지키는 싸움을 해왔던 소녀가 있었다."


 그녀가 엄숙하게 운을 띄운다.


 "지혜롭고 아름다우며, 강하고 고결하며, 그, 으음, 아, 아름다웠던 그 소녀는 어느 날 다시 없을 세계의 위기가 곧 닥칠거라는 예언을 받게 된다."

 "……."

 "아름답고 강한 그녀였지만, 역시나 세계의 위기에 맞서기엔 힘이 부족했고, 그녀는 조력자를 구하러 세계의 앞면, 즉, 보통의 세계로 온다. 그리고…… 그녀와 어깨를 나란히하고 싸울만한 잠재력을 가진 소년의 앞에 나타나, 이렇게 말한다. '나와 함께 세계를 구해줘.'"

 "하지만 그 소년은 이미 마왕 퇴치라는 선약이 있었고, 퇴짜를 맞은 그 소녀는 소년에게 매달리다가 결국 세계의 위기는 뒷전으로 하고, 마왕 퇴치에 힘을 보태게 된다."

 "잠깐! 그러면 이야기가 안 살잖아! 소녀와 소년이 힘든 싸움과 고난, 역경을 딛고 결국 세계의 적을 해치우고 이어진다는 얘기를 단행본 6권 분량으로 이야기 하려고 했는데!"


 그녀가 화를 내며 말한다.

 너무 길잖아.


 "사실이 그렇잖아. 게다가 결국 그 마왕이 세계의 위기였다는 웃기지도 않은 결말이었지."

 "그리고 그 마왕한테 죽어버리고 말이지. 이야, 거기서 죽지 않았다면 윤이 선택한 건 나였을텐데. 아쉽다, 아쉬워."

 

 그녀가 에헤헤- 웃으며 가볍게 말한다.

 죽은 지 5년이나 돼서 자신의 죽음에 무뎌진 거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이 아가씨는 자신이 죽은 직후, 유령이 됐다는 걸 알자마자 이런 태도를 보였었다. 

 지혜롭고 고결한지는 몰라도, 멘탈이 강한건 보증한다. 

 아름다운 것도, 뭐, 맞으려나. 아름답다기 보단 예쁘고 귀여운 쪽이지만.


 "그런고로, 마왕에게 죽고 유령이 되어버린 소녀의 차례입니다."

 "응? 뭐야, 그 나레이션 풍의 대사는."

 "별 의미없어. 새로운 인물이니 새롭게 시작해봤을 뿐이야."

 "새로운 인물이라는 건 새롭지 않은 인물도 있는 거야?"

 "방금 리스를 보고 온 참이야."

 "헤에, 그렇구나."

 

 그녀는 둥실둥실 떠다니며 집을 이리저리 돌아다닌다.

 그 한가로운 모습에 자연히 웃음이 지어진다.


 집으로 돌아온 뒤, 나는 바로 그녀를 소환했다. 소환이라고 해봐야, 특별히 무언가를 하는 건 아니고, 그저 오라고 조금 강하게 생각하면 된다. 

 반응은 역시 재빨라서, 5초도 지나지 않아 유령은 벽을 뚫고 나왔고, 뭐가 기분이 그리 좋은지 아까부터 시종일관 들뜬 상태다.


 "그래서, 그래서? 무슨 일이야? 직접 불러주는 건 꽤 오랜만이잖아?"

 "그거야, 직접 부르지 않아도 거의 항상 이 집에 있으니까 그렇지."

 "그래도, 그래도. 뭔가 직접 불러주면 더욱 강한 연결을 느낀다고 해야할까? 그런 게 있지 않아?"

 "없어. 강하게 생각하면 네가 알아차리고 온다는 구조는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사랑의 힘이야, 분명!"


 그런 게 있겠냐.


 "뭐, 아무튼, 5년이나 지났으니까 그 애들이 어떻게 지내나 둘러보려고 하는 참인데."

 "흐응, 드디어 결심을 했구나. 좋아, 좋아."

 "사실 너야 항상 보니까, 별로 따로 얘기할 필요는 없지. 그래도 일단은 '주인공'이었던 윤의 '히로인'이었으니까, 리스가 지목한 김에 불러본 거야."

 "'일단은'은 뭐야?"

 "그야 너, 지금은 별 감정 없잖아."


 리스처럼 시간이 지나면 마음이 옅어지기 마련이지만, 이녀석은 조금 경우가 달라서, 죽은 뒤 유령이 되었다는 걸 알고 깔끔하게 윤을 포기했다.

 그 단칼에 끝맺음하는 모습을 보여준 뒤로, 이녀석은 좋을대로 살고 있다. 높은 비율로 내 집에 있긴 해도, 밤에는 거의 모습이 보이질 않고, 낮에도 가끔 사라질 때가 있다. 리스한테는 얼굴을 비추는 것 같은데, 혹시 다른 애들쪽에도 찾아가는 걸지도 모른다. 

 

 "으음, 그렇네? 생각해보니 이런 몸이 된 뒤로 윤을 보러 간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정말?"


 나는 그 말을 듣고 놀랐다.

 아무리 깔끔하게 접었다해도 설마 한 번도 안봤을 줄이야. 유령이 된 상태여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걸 알았다면, 윤은 좋아했을텐데. 죽었을 당시에도 굉장히 슬퍼하기도 했었고.

 뭐, 결혼하고 나서는 그런 기색을 전혀 보이질 않긴 했구나. 윤, 이 나쁜 자식.

 속으로 윤을 욕하는 사이, 그녀는 응, 응, 하며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치만, 윤의 여자친구, 아, 지금은 아내인가. 걔는 어차피 날 보지도 못할테니, 축하한다고 인사도 못해주잖아? 이제와서 윤을 볼 필요는 없고."

 "그건 그렇긴한데……. 근데 보이고 안보이고는 조절할 수 있는 건 아니었어? 네 귀찮은 능력 중 하나잖아."

 "귀찮은 능력이라니, 실례되는 소리를 하네. 그건 정확히는 보이는 사람에게 보이지 않게 하는 능력이야.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 보이는 능력이 아니라."


 그런 세세한 설정이 있을 줄이야. 적당히 알아서 조절하는 건 줄 알았는데.

 

 "어쨌든 너랑은 별로 이야기 할 생각이 없었는데, 리스가 너에게 꼭 전해달라는 얘기가 있어서."

 "리스가?"

 "너, 리스한테 불쑥 찾아가고 그러냐? 밤에?"

 

 내 말에 그녀가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응, 밤에 심심할까봐. 몇 번 찾아간 적이 있네."

 "일단 참고삼아 물어본다. 문으로 얌전히 들어갔지?"

 "에이, 그런 걸 할 리가 없잖아. 목욕할 때 벽에서 고개만 벽에서 내밀거나 했지."

 

 ……역시나. 

 나는 머리가 아파졌다.


 "그만해, 그런 거. 나야 지금은 익숙해졌어도, 예전을 생각해봐. 걔네들도 엄청 놀랄 거 아냐."

 

 사실 지금도 내색을 안할 뿐, 엄청나게 놀라곤 한다. 자고 있는데, 침대 아래에서 머리가 불쑥 튀어나오면, 누구라도 놀라는 게 정상이다.


 "으응, 그런가. 뭐,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그럴게."

 "별로 신용은 안되는데."

 "에이, 한 번 말하면 지키는 여자라구."


 그런 걸로 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그보다 너, 리스한테 찾아갔었으면 나한테 말을 좀 해주지 그랬어. 오늘 만날 때까지 걔가 죽었나 살았나도 모르는 상황이었잖아."

 "가봐야 게임만 하고 있는 걸 뭐. 잘 살고 있으니까 따로 얘기 안한 거 아니겠어? 갔는데 쓰러져 있으면, 당장 얘기해야지."

 "그래도 내가 걱정하는 걸 그냥 보고 있다니, 너무하네. 평소에 그렇게 떠들던 사랑은 어디간 거야."

 "흐흥, 걔네들이 잘 살고 있다는 걸 알았다면 진즉 보러갔을 거잖아? 아끼는 남자를 독점하기 위한 여자의 계략이라고 생각해 줘."


 안 된다. 말싸움에선 이길 수가 없다.

 주로 외양적인 면으로 내가 강하게 나가지 못하는 탓도 있지만, 원래부터 이상하게 입심이 센 탓에 다른 여자애들도 꼼짝 못했었다. 유일하게 대응이 되던 건 윤인데, 걘 하는 말을 전부 들어주는 것뿐이니 논외다.

 

 "그래도, 결심을 해서 찾아간 건 잘한 일이야. 칭찬해줄게."

 "독점은 어디간 거야."

 "여차할 때 뒤에서 응원해주는 것도 좋은 여자의 마음가짐인걸."

 

 묘하게 아까부터 고자세다. 지금도 보란듯이 의기양양한 포즈를 잡고 있다. 뭐, 이런 천덕스러운 점이 이녀석의 장점이다.

 

 "다음은 어디로 갈 거야?"

 "아니, 아직 안정했는데."

 

 시간도 애매하다. 점심 즈음에 리스네 집에 갔다가 돌아오니, 지금은 벌써 저녁에 가까운 시간이 됐다. 누군가를 찾아가기 적합한 시간은 아니다. 

 

 "누구한테 가도 반겨줄테니까, 샥샥 가버리자구."

 "리스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사전에 연락을 하고 가는 게 좋을 것 같아. 생각해보면 너무 무작정 찾아간것 같은데."


 생각해보면이고 자시고,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막 찾아간 건지 모르겠다. 사전 연락은 기본인데. 

 내가 그렇게 말하자, 그녀가 둥둥 떠다니며 고개를 젓는다.


 "노, 노, 그게 아냐. 오히려 여기선 팟, 하고 몰래 찾아가서 깜짝 놀래키는 게 정석이니까 말이지. 5년 만에 본 그리운 얼굴에 놀라면서도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그녀, 그리고 그녀의 성숙한 모습에 마음이 술렁거린 그, 마침내 그들은 금단의 사랑을 시작하게 되는데……."

 "별로 금단도 뭣도 아니잖아."

 "응, 그렇긴 하네. 그래도 버려진 여자와 그녀를 버린 남자의 친구라는 조합은 가슴을 술렁이게 하는 무언가가 있단 말이지."

 "없어, 없어."

 "에이, 넌 없어도, 그 애들은 혹시 또 모르잖아? 윤이 끝나버린 지금, 걔네들과 가장 친한 남자는 바로 너라구."

 "'친했던'이겠지."


 5년이나 지난 얘기다. 리스의 경우가 원만히 잘 풀린 걸지도 모른다. 다른 애들을 찾아가도 문전박대를 당할 수도 있다.

 애초에 생존확인이라는 핑계로 찾아보려고 마음먹은 것도, 내 자기만족에 불과하다. 리스가 건강하게 살아가고 있는 모습에 얼마나 큰 안도를 느꼈는지.

 그런 생각이 겉으로 나왔는지, 아니면 언제나 말하던 사랑의 힘으로 눈치를 챘는지, 그녀가 온화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리스한테 다녀왔다며? 걔가 싫어하는 모습을 보여주거나 하진 않았지? 오히려 좋아서 어쩔 줄 몰라했을지도 몰라. 왜냐면, 내가 가끔 놀러갔을 때도 리스는 네 얘기를 자주 했거든."

 "내 얘기?"

 "응. 잘 지내고 있냐는 둥, 뭘 하고 있냐는 둥, 여러가지. 뭐, 리스한텐 우리가 거의 같이 살다시피 하고 있다는 얘기는 안했으니까, 적당히 둘러댔지만 말이야!"

 

 하아. 그런 얘기를 했었단 말이지.

 아까 리스와 얘기했을 때는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는데.


 "아무튼 그런 거야. 세세하게 말하긴 좀 그래도, 다른 애들도 마찬가지니까 자신있게 가보자구. 참고로 내 추천은 윤의 여동생이야."

 "여동생? 걔는 왜?"

 "네가 찾아가면 제일 기뻐할 애라서. 윤 그 나쁜 자식은 결혼하고 나서 한 번도 동생한테 찾아가지 않았을걸? 동생이 아니라 '히로인'으로 대했으니까, 다른 애들과 똑같이 행동했겠지."

 "그건……."


 좀 너무한데.

 윤이 뒤돌아보지 않는 건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그 정도일줄은 몰랐다. 하물며 동생까지 그런 식으로 대할 줄이야.

 아무리 친동생이 아니어도 그렇지, 인생의 태반을 같이 보낸 가족인데.


 "정말 너무했지? 윤은 하여간 언젠가 크게 데여봐야 한다니까. 주변 여자애들 중에 조금만 성깔 나쁜 애가 있었으면, 바로 부엌칼로 슥삭-이었을텐데, 다들 너무 착해서 탈이야."

 

 그녀가 손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하며 가볍게 말한다. 이 팔자 좋은 유령은 잘 모르겠지만, 그런 전개 직전까지 간 적은 있었다. 내가 어떻게든 뜯어 말리는 바람에 칼부림까진 가지 않았고, 그 뒤로도 그런 짓은 하지 않겠다고 약조를 받았는데, 5년 동안 어떻게 지냈으려나 모르겠다. 

 ……일단 윤이 살아있으니, 흉흉한 일이 일어나지 않은 건 틀림없긴하다.


 "아무튼 여동생이야, 여동생. 리스도 날 지목했다며? 그럼 나도 지목할테니까, 그리로 가봐. 지금 당장가서 저녁이나 먹자고 얘기하는 게 어때? 집도 멀지 않잖아."


 "으음."

 

 늦든 빠르든 언젠가는 가야할 곳이다. 등도 밀어주는 김에 가볼까.

 

 "알았어. 가볼게."

 "그래! 그렇게 나와야지. 그럼 당장 렛츠 고!"

 

 쾌활하게 말하는 그녀의 장단에 맞춰, 나는 집을 나섰다.

 

 

 


'후보' 카테고리의 다른 글

' XX의 방  (0) 2018.02.27
3. 변함없네  (0) 2017.12.04
1. 오랜만이야  (0) 2017.11.23
- 120のセリフの御題  (0) 2017.11.21
히로인론  (0) 2017.09.06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