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어딘가의 누구께서는 '이번엔 빨리 올 게.'라고 말하긴 했지만 말이야. 나는 전-혀 화나지 않았다구?"
"……미안."
정말, 면목이 없다.
"아냐, 책망하려는 건 아냐. 아예 게임만으로 한정을 시키고, 2개월에 한 번만 들리는 걸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어, 그건……."
문득 그녀의 얼굴을 보니 어쩔 수 없다는 체념의 표정이 어려있다.
이건, 나 때문인가. 나 때문이겠지. 내가 늦게와서…….
"아니, 그런 거 아니야. 물론 너의 상황도 고려하긴 한거지만, 내가 시간이 안 될 것 같아."
"시간?"
"응. 조금 귀찮은 일에 말려들어가서."
귀찮은 일이라니 뭘까. 얘기만 들어서는 소설을 쓰는 일에 대한 건 아닌 것 같은데.
"뭐, 그런 상황이야. 가능하면 너랑 자주, 오랫동안 보고 싶지만, 사정이 여의치가 않네. 그래서 2개월에 한 번이야." "그 2개월에 한 번이라는 건, 꼭 지켜야하는 거야?"
내가 그렇게 되묻자, 그녀는 놀라더니 시선을 피한다.
"아, 아니. 꼭 지킬 필요는…… 없어. 지금까지 이런저런 이유로 늦게온다고 매도도 했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강요도 했지만, 너도 사정이 있을 거고 굳이 꼭 2개월에 한 번은 와야된다는 얘기를 강제로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3개월, 아니 하다못해 반년에 한 번 정도만 와줘도……."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렇게 할 리가 없잖아." "어?" "내가 말한 건, 2개월에 한 번을 넘게 와도 되냐는 얘기였어. 게임만으로 한정시킨다 해도, 혹시 더 빨리 올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그런데 네가 바쁘다고 하니까……."
"아, 아아! 아, 아니야! 절대로 아니야! 무, 물론 바빠서 정말 본의 아니게 못 만날 가능성도 있지만, 저, 절대로 한 번만 오라는 걸 강요하는 건 아니야. 온다고 하면 절대로 시간 낼 테니까! 꼭 낼 테니까!"
화급히 말하는 그녀를 보고 나는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아아, 역시 나한테는 과분한 자리다, 여긴. 이렇게 귀여운 여자애랑 얘기를 정기적으로 하는 것만큼 좋은 일이 없을텐데, 어쩌자고 나는 찾아오는 게 매번 이렇게 늦는걸까. 개인적인 사정이 있다한들, 역시나 전적으로 나쁜 건 나다.
"제목은 シンソウノイズ. 뭐, 여러 의견이 있겠지만, 진상노이즈, 라고 번역하는 편이 나으려나. 주인공인 타치바나 카즈마는 '수신능력'이라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주변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이야. 다만, 완벽하지는 않아서 마음 속 소리는 전부 기계음으로 들려서 누가 누군지 분간은 못해."
"흐음, 흐음."
"그런 와중에, 주인공은 매일 옥상에서 자신이 떨어져 죽은 시체를 상상하는 유키모토 사쿠라, 라는 소녀를 만난달까, 이전부터 그녀를 훔쳐보곤 했는데."
"스토커네."
"아, 아니, 뭐, 스토커까진 아니고. 아무튼. 학기 시작 후, 클래스 내의 반이라는 걸 꾸리게 되는데, 유키모토도 주인공과 같은 반에 속하게 돼. 매일같이 자신의 시체를 상상하는 그녀에게 알 수 없는 감정을 품고 있던 주인공은, 어느 날 옥상에서 그녀가 정말로 뛰어내릴 것 같게되자, 숨어있던 곳에서 뛰쳐나와 말리게 되지.
"뭐, 그런 이야기야. 역시나 중반부터 초반부의 추리와는 다른 요소가 섞여버려서 이야기가 다른 방향으로 치달은 건 조금 마이너스 요소지만, 아주 엉뚱한 이야기는 아닌데다가 처음부터 복선을 잘 회수한 내용이어서 괜찮았다고 생각해."
"추리물이랬는데, 갑자기 능력이 어쩌고 나오는 시점에서 좀 이상하긴 하네."
"그렇지. 사실 이런 류 게임에서 본격적인 추리물을 기대한 사람은 얼마 없을 거라 생각하는데, 체험판에서 본격적인 추리를 보여줬기 때문에 사람들의 기대치가 높아진 반동이라고 해야할까. 이런 식으로 쭉 엔딩까지 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중간에 예상과는 다른 소재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이되니, 자연히 실망감을 품을 수밖에."
"너는 어땠어?"
나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조금 다른 게 있다면.
"기대가 그리 크진 않았어. 그래서 실망도 조금 덜했다고 해야하려나. 애초에 추리부터가 주인공만이 알 수 있는 '마음의 소리'나 히로인인 모모가 가진 기억 능력에 의존하는 부분이 커서, 거기에 조금 다른 능력이나 이런 게 섞인다한들, 별다른 거부감이 없더라고. 오히려 능력을 활용한 범죄를 추리로 푸는 게 즐거웠지."
"그래도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기대할 정도면, 추리부분의 완성도는 꽤 괜찮았나보네?"
"어, 확실히 괜찮았어. 추리파트를 따로 만들어둬서, 중요한 질문에 대해 답하는 형태로 되어 있었는데, 판단 근거로 활용할만한 요소도 깔끔하게 나열되어 있고, 회상 기능 같은 것도 지원해서 여러모로 편리했지. 무엇보다 좋았던 건, 이런 류의 게임이 선택을 그르치면 게임오버가 된다거나 배드엔딩으로 가는 경우가 많음에도, 이 게임은 최후반부의 범인 선택을 제외하면 틀려도 몇 번이고 다시 선택할 수 있다는 점이야. 밸런스를 잘 취했다고 생각해. 추리를 전혀 하지 못해도, 일단은 진행할 수 있게 해놨거든." "난이도는?"
"으음, 후반부에 있는 주관식 문제 이전까지는 쉬운 편이었어. 힌트도 여러군데 있고, 문제도 어렵지 않았고. 다만, 주관식 문제는 조금 어려웠으려나. 난 특히 파자가 어렵더라. 이 부분에선 틀리면 진행이 안되니까 힘들었지."
"그 부분은 문화나 언어의 차이 때문에 그런 거 아냐?"
그럴지도. 파자 같은 건 해당 언어에 대한 지식이 기반에 깔려 있어야 푸는 게 가능한 문제다. 그리고 그 노래에 관한 문제도 일단, 구글님의 힘을 빌어서 풀긴 했지만, 모르는 노래였으니.
"스토리는 특출나게 좋진 않아도, 안정감이 있었어. 사건의 발단이 유키모토 살인사건의 진상을 푸는 거라, 캐릭터 개별 루트는 결국 곁가지로 빠져나가는 형태가 되는데다가, 아무래도 힘이 좀 빠져 있지만 저번에 했던 Re:LieF의 개별 루트보단 훨씬 좋았고. 개별 엔딩 후에 후일담 같은 게 아예 없어서 그 부분은 좀 아쉽네."
"후일담 같은 건 군더더기잖아."
"그런 의견도 있을 수도 있지. 그래도 플레이 하는 입장에선 그 뒤로 어떻게 됐나가 가장 궁금한 요소잖아? 비단 개별 엔딩만이 아니라 트루쪽에서도 후일담이 없는 건 사람에 따라선 감점 요소가 될 수 있을 것 같긴 해. 아, 근데 이건 후속작을 위한 안배인가. 진히로인은 물론 모모지만, 여전히 다른 히로인들의 호감을 사는 만큼 경우에 따라 하렘이라는 것도 있을 수 없는 미래는 아니고…….아."
그녀가 뭔가 기분나쁜 것을 봤다는 얼굴을 하고있다.
미안하게 됐네요.
"그러고보니 신규 게임사랬지?"
"응. 그리고 이게 첫 작품." "그렇다면, 네가 말하는 것처럼 후속작의 안배일 수도 있겠네. 이야기만 듣기로서는 한 번 쓰고 버리기는 아까운 설정이고."
"캐릭터도 아깝고 말이지."
"잠깐! 과거 경험을 통해 여기서 네가 좋아할만한 캐릭터를 맞춰보겠어. ……성격으로는 유키모토겠지만, 과연 이건 좀 부족한가. 밸런스를 생각했을 땐 오오토리 유리코다!"
아쉽지만, 아니다. 뭐, 오오토리도 좋지만. 좋아하는 성우가 맡기도 했고.
"성격면으로는 진히로인인 모카가 제일 좋고, 종합적으로는 쿠로츠키. 모카는 설정 때문에 진히로인이라는걸 알았지만, 처음엔 좀 실망했거든. 근데 갈 수록 예뻐지는데다가 성격도 엄청나게 착하고, 정말 좋은 캐릭터지. 쿠로츠키쪽도 어떨까 싶었는데 능력 관련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대활약하고, 무엇보다 머리 푼 모습이 예쁘지! 그것 외에도 전반적으로 매력적인 모습이 많이 나왔어. 카자마나 유리코에 비해선 이쪽 둘이 압도적이지."
"하아. 결국 예쁘면 다 좋다는 거 아냐."
"아, 아니,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여하튼 캐릭터는 확실히 잘 만들었어. 개별 엔딩은 역시나 좀 부족하지만, 큰 줄기의 메인 스토리에서 각각의 매력을 충분히 살렸으니까. 더군다나 관심에서 멀어지기 십상인 남자 캐릭터들도 개그는 개그, 진지할 땐 진지하게 역할이 잘 주어져 있어서 그것도 호평이야."
"개그? 개그가 나올 여지가 있어?"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어본다.
아, 내용만 보면 없어보일 수도 있겠다.
"거의 주인공이 마음 속 소리를 읽는 장면에서 나오지만 말이야. 그 기계음 특유의 무기질적인 목소리로 웃기는 장면이 꽤 나와서 나도 정말 오랜만에 웃으면서 했어."
"오오, 그건 꽤 괜찮네. 원래 울리는 것보다 웃기는 게 힘든 법인데." "그렇지. 뭐, 그런 면도 포함해서 스토리 전개가 좋은 편이라고 말한 거지만 말이야. 으음, 그리고 역시 제일 최강점은 엄청나게 유려한 일러스트지. 그야말로, 최근 본 게임 중에선 거의 최고급의 일러스트 아닐까?"
"저번의 Re:LieF 때도 그런 소리를 들었던 것 같은데."
"아아, 그것도 엄청나게 좋지만, 이건 조금 다른 방향으로 좋다고 해야하나. 레리프쪽은 배경이나 채색 같은 게 굉장히 사실적인 느낌이 좋았지만, 이건 일반 상식적인 게임이라는 틀 내에서 굉장히 좋은 작화라고 해야할까. 배경은 평범했지만, 캐릭터 디자인이나 CG의 채색이 굉장히 깔끔해서 그야말로 이상적인 게임 디자인이라는 느낌이었지."
"흐응, 알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어려울 것 없이 엄청 좋았다고만 알면 될 것 같네."
실제로 정말 좋았다. 그림의 타입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특정 방향에서라면 수위권을 다툴 정도로 좋았다.
"음악쪽은 나쁘지 않은 정도. 오프닝 엔딩은 확실히 좋았고, 메인테마곡 같은 건 귀에 남을 정도로 좋긴 했는데, 나머지는 특별한 건 없었네."
"흐음, 이래저래 스토리에 관해 얘기가 나오긴 했어도, 전반적으로 호평인 느낌이네."
"응. 뭐, 나는 재밌지 않으면 중간에 버려두는 타입이라."
꾸준히 재미가 있어야 계속 하는 스타일이다. 아니면, 나중에 재밌을 거라는 확신이 들던가.
"그래서 나도 그렇게 버려두는 거야?"
"아니, 진지하게 그런 소리를 하지 말아주십시오."
정말로요. 눈이 무섭다.
"종합하면 10점 만점에 8점. 이걸로 됐으려나?"
"오오……라고 할까, 저번에도 8점이었잖아. 레리프보다 좋은 거 아니었어?"
"응, 뭐 그렇긴 한데. 근소한 차이랄까, 구분하는 게 의미가 없달까. 그런 느낌. 여기서 8.5점이라고 하긴 좀 그렇잖아."
"아니, 괜찮은데."
자꾸 반복되다보면, 10점 만점에 8.32점 이렇게 되어버릴지도 모른다고.
"이번엔 좀 색다른 이야기라서 좋았네. 추리물은 많진 않으니까."
"도움이 될 것 같아?"
"글쎄. 지금 쓰는 게 추리물은 아니지만, 어떻게든 도움이 될 요소가 있겠지. 아니, 그렇게 할 거야. 소중한 이야기니까 말이야."
"……그래."
그러고보니 오늘은 어쩌다보니 먹을 것도 안시키고 그냥 진행을 해버렸네.
들어오자마자 이야기를 급하게 하다보니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그녀도 노트북을 두들기다가 그걸 눈치챘는지,
"바로 갈 거야?"
라고 물어봤다.
그렇게 말하면, 갈 수가 없잖아.
"……뭐라도 좀 먹고갈까."
"응. 지금 헤어지면 2개월 뒤에나 볼 것 같으니까……. 가능하면 오래있다가 가."
"2개월 안으로는 오겠지만……, 뭐, 괜찮겠지."
그녀나 나나 앞으로 바빠질 것 같은 건 사실이니까. 오늘만큼은 조금 느긋하게 있어도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