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Re:LieF
Re:LieF, 2016.10.28 Ras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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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30 ~ 2016.11.04
"선처는 어디간거야, 선처는."
"정말 죄송합니다.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냉담한 어조로 눈을 흘기는 그녀에게 나는 차가운 플로어에 엎드려서 사죄를 구했다.
"분명히, 당장 다음 날이라도 올 것 같은 느낌으로 '의외로 빠를지도 모른다'라고 해놓고선, 2개월동안 무소식인건 조금 너무했지."
"그렇게 '생각'한 건 사실이지만, 너한테 말한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요는 네가 매달 적절한 돈을 받아가면서 해야할 일을 태만하게 했다는 점이지."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변명할 말이 없다.
"그래서? 이번엔 왜 이렇게 늦은 거야."
"그 동안 하고 싶은 게임이 별로 없었습니다."
"뭐야, 이번에도 게임? 책은? 애니메이션은? 영화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전적으로 내 잘못이지만, 절대로 책임을 방기한 건 아니다. 책, 영화도, 애니메이션도 분명 봤음에도 그녀에게 말해주지 않은 건, 그럴만한 내용이 아니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뭐, 좋아. 게임은 한 번에 들을 수 있는 정보량이 상당하니까, 좋아하는 편이고. 다만, 앞으로는 좀 자주 와줬으면 좋겠어. ……혹시, 이 일이 싫어진 건 아니지?"
"그건 아니야."
조그맣게 물어보는 그녀의 말에 내가 대답한다.
그런 건 절대로 아니다.
다만, 그녀가 써내려가는 소설에 내가 영향을 미친다면, 조금이라도 더 좋은 이야기를 전달해주고 싶은 마음에 이야기를 고르는 것 뿐.
"다행이야. 그만둔다고 하면 언론사에 멋대로 내 몸을 더럽히며 돈도 갈취해간 나쁜놈이라고 인터뷰를 하려고 했는데."
"……절대로 그만두지 않을테니까, 그런 소리는 농담으로라도 하지마."
"기뻐. 음, 오랜만에 만나서 이런저런 얘기가 쌓였지만, 할 건 해야지. 잡담은 그만하고 시작할까."
노트북을 꺼내며 그녀가 말한다.
나는 마스터에게 아이스크림을 하나 주문하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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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이야기야. 기대한 거랑은 꽤 다른 내용이었고, 초반부터 충실히 내용에 대한 근거를 던져줬기 때문에 반전이라고 부를 정도의 충격은 없었지만, 깔끔하고 좋은 이야기지."
"흐음."
그녀는 다시 노트북을 두드린다.
"스토리 자체에 대한 의외성은 사실 없다고 봐야 하려나. 배경과 설정이 다를 뿐, 이야기의 발단이 되는 구조 자체가 아주 비슷한 유명한 소설이 있는데다, 아까도 말했다시피 트루 루트의 소위 말하는 '진상 까발리기'에 제작진이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고 느낄 정도로, 캐릭터 루트에서 대부분의 이야기는 예상이 됐어. 나같은 경우는, 체험판 때 의심하다가, 제일 먼저 한 캐릭터인 루카 루트에서 거의 확신에 가까울 정도로 진상을 파악했으니."
"그런 것 같네. 나야, 실제로 해보지는 못했지만, 대부분의 플레이어가 예상이 되는 수준이겠지?"
"맞아. 애초에 작품의 주요 키워드가 지속적으로 반복이 되니까. 모를 수가 없지."
게다가 연출 또한, 의도적으로 그런 방향으로 생각할 수 있게 해놨다.
보통이라면, 미스 리딩을 위해 그런 연출을 깔겠지만, 이 작품은 순수하게 예상대로의 정답을 보여준다.
"깔끔하고 좋은 이야기임에는 분명한데, 네 말을 듣다보면 너는 게임에 대해, 아니 정확히는, 스토리에 대해 굉장히 만족한 것 같거든."
"그래. 아주 만족했어."
"이유가 뭐야?"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어본다.
이유.
"오프닝과 PV에서부터 꾸준히 나오는 캐치 프라이즈가 있어. '試してみるんだ、もう一度’ 라는건데, 그야말로 딱 그런 느낌의 이야기여서 좋았어. 대부분 주제는 그냥 '있어야하니까' 설정해둘뿐이고, 결국 캐릭터에 집중해서 주제 전달은 비약하게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은데, 이건 그렇지 않았거든. 처음부터 끝까지, 저 문구대로, '다시 한 번'의 느낌을 잘 살렸다고 생각해. 그 탓에 캐릭터 루트쪽은 조금 빈약해진 것 같지만, 이건 어쩔 수 없지."
"흐응, 그런가. 캐릭터에 휘둘리지 않았다는 말이지?"
"맞아. 주제가 기준을 잡고, 그 뒤에 캐릭터가 있는거지, 캐릭터에 주제가 휘둘리면 안되거든. 루카와 모모는 다소 부족해도, 적어도 히나코와 츠카사의 이야기에서는 그 '절망 뒤의, 다시 한 번의 기회'가 주는 절실함을 잘 살렸다고 생각해. 작중에 등장하는 유우의 대사대로, 추악한 세계에서 벗어난 이 낙원에서, 계속 살 수 있음에도 그걸 뿌리치고 자신에게 절망만을 준 섬 바깥으로 다시 나가는 거잖아. 그런 이야기는 좋아해."
"의외네. 매번 서로 죽고 죽이는 이야기만 좋아하는줄 알았는데."
그런 것도 좋아하긴 하지만, 사람이 하나만 좋아할 수는 없는 법.
사실 그런 이야기도, 처음부터 끝까지 마냥 절망하고 좌절하고 그러기만 하면 재미가 없다. 절망할 수 밖에 없는 상황 속에 피어난 한 줄기 희망을 붙잡는 그 카타르시스가 좋은거니까.
"그건 그렇고, 사회 생활을 실제로 하고 있는 플레이어들은 조금 움찔할 내용일 것 같네. 하하키기, 히나코? 걔의 그런 케이스는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 드물테니까 말이야."
"사실 나도 그런 사람들을 모아 다시 사회로 재진출하는 걸 돕는 이야기라길래, 일본, 어디까지 간 거냐, 라고 생각했어."
"실제로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
"있으면 좋겠지만, 작중의 저런 시스템을 구축하는데 들어갈 비용을 생각하면……."
"뭐, 그렇겠지."
애초에 그런 '여유로운 시스템'을 구축할만큼, 인정 넘치는 사회가 있을 것 같지 않다.
"개인적으로 제일 좋았던 부분은 '실제의 사건'을 게임 내에서 언급한 부분이었어. 작중에 주요 소재에 대한 설명이 나올 때, 검색을 해보니 정말로 다 실제로 일어난 일이더라고. 바로 얼마 전에 있던 유명한 사건도 언급이 되어있었고. 그리고 백미는 그 노래지."
"노래?"
"데이지 벨. 부끄럽지만, 나는 이 노래를 여기서 처음 알았어."
"아아, 그 노래. 나도 지식으로만 알고 있는데."
"히로인인 유우가 그 노래를 부르는데, 그걸 보면서 츠카사가 노래에 대한 의미를 얘기해주는데, 그 몇 안되는 노래에 대한 설명 부분이 정말 좋더라고. 뭐랄까, 여러 줄의 설명과 설정을 늘어놓는 것보다, 훨씬 와닿는다고 해야할까."
"노래도 좋지."
"응. 게다가 그 때까지 유우라는 캐릭터는 주인공을 미혹에 빠뜨리는 악역……이라고 해야할까, 히로인들과는 다른 측면에 서있는 캐릭터였는데, 그 부분으로 일거에 느낌이 바뀌어 버리지. 제작사 홈페이지에선 서브 히로인이라고 나와있지만, 사실 진히로인을 찾자면 아이보단 유우라고 생각하거든. 이어서 이어지는 피아노 협주 부분은 정말 게임의 백미라고 할 수 있지."
내 말에 그녀는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갸웃거린다.
아, 저번에도 이런 장면이 있었던 것 같은데.
"역시나, 이런 캐릭터가 취향인가보네. 유우는 조용하고, 차분하고, 말 수가 적은 캐릭터잖아?"
"으, 응, 뭐 그렇네."
"……말을 좀 줄이는 편이 좋을까."
"뭐, 뭐어 그건 넘어가고. 캐릭터 얘기가 나와서지만, 주요 히로인인 것처럼 보이던 3인방인 히나코, 루카, 모모는 솔직히 임팩트가 좀 약했어. 캐릭터 루트의 빈약함 때문에 CG도 별로 없고, 히나코를 제외한 2명은 배경 스토리도 많이 부족하지. 덕분에 좋은 점수는 못 줄 것 같은데, 메인 히로인인 아이와 서브 히로인인 미랴, 그리고 유우가 너무 좋아서 캐릭터쪽도 고득점이야. 특히 아이나 미랴는 귀여워서 좋은 거고, 유우는 스토리를 생각해보면 좋아질 수밖에 없는 캐릭터지. 그리고 내 취향…… 음, 그래, 내 취향이야!"
"헤에……."
의미심장한 어조로 말을 줄인다.
지금부터 그런 컨셉으로 가는 거냐? 취향 여부는 둘째치고, 조롱받는 게 조금 줄어든다면 내 쪽은 편할 것 같다.
"여하튼. 여전히 말주변이 없어서 미안한데, 좋은 작품이었어. 특히나 근래의 불황인 게임 시장을 감안하고, 그나마 나오는 것들도 별다른 고민없이 만들어지는 얄팍한 이야기라는 걸 생각하면 충분히 높은 점수를 줄만하다고 봐."
"그렇구나."
"객관적으로 생각하면 스토리쪽은 다소 부족함이 있다고 봐야겠는데, 그건 개인적인 감상으로 넘어가고. CG나 연출, BGM에 관해선 이견의 여지없이 훌륭하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네. 특히나 이렇게 힘을 준 CG는 정말 오랜만이야. 척 보기에도 이만큼 힘을 줬으면 기대를 하는게 당연할 정도로 잘 그렸거든."
"그런 것 같네. 찾아보니까. 캐릭터 디자인은 유행하는 추세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지만, 배경 같은 건 수준급이고."
"사실 그런 것 때문에 너무 점수를 좋게 한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 것도 아니지만……, 뭐, 괜찮나."
어차피 객관적이지 않은 주관적 평점이다. 내가 마음에 들었으면 그걸로 된 거겠지.
"히로인 3인방의 비중이나 개별 스토리가 빈약한 것을 제외하면 대부분 좋다고 봐도 될까? 네 평으로는 그렇게 들리는데."
"맞아. 이제와서지만, 저번의 레이라인을 7점이나 준 건 좀 많이 준 것 같네. 레이라인보단 확실히 좋았는데, 8점은 조금 많은 것 같으니까. 그래도 10점 만점에 8점!"
"오오."
기세 좋게 소리치니 짝짝-하고 그녀가 박수를 친다.
아니, 박수를 칠 타이밍은 아니지.
"좋아, 좋아. 좋은 이야기였어. 이걸로 또 한동안은 해낼 수 있겠어. 누군가가 다음 번에 조금 일찍 와준다면 술술 진행되겠는걸."
"……알았어. 다음 번엔 일찍 올게."
게임, 으로 한정지으면 오는 건 한 달을 훌쩍 넘기겠지만, 그 사이에 뭔가 다른 걸 얘기해주면 되려나.
저번에 금방 올 것 같이 얘기해두고, 이렇게 늦어져버린 건 정말로 미안하다고 생각한다.
"그 말, 다시 한 번 속아주겠어."
불안하면서도, 강한 눈빛으로 그녀가 그렇게 말한다.
이번에는 지킬 수 있도록 노력해봐야지.
"좋아, 그럼 슬슬 가볼까. 아까 한동안이라고 했지만, 이 정도면 얼마만큼 진행될 것 같아?"
"글쎄. 일주일쯤?"
"오, 좀 길잖아. 이야기가 좋아서 그런건가?"
저번의 레이라인은 하루라고 그러더니만.
"……오랜만에 보고싶은 사람 얼굴을 봐서 힘을 내보려고."
"……그거 고맙네."
여전히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아니,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은 아니구나.
조금은 부끄러워하는 얼굴로, 되돌려줄 반응이 곤란한 말을 한다.
"그럼 나중에 봐. 소설 힘내고."
"그래, 다음에도 좋은 이야기 부탁할게."
"응."
잠시 손을 흔들던 그녀는 이내 노트북 화면을 잡아먹을 듯, 화면을 노려본다.
일주일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오늘 하루는 힘낼 수 있겠지.
그녀의 작업에 내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일의 보람이 있다.
나는 그런 걸 생각하면서, 카페를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