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보

1. 현실적 상황에 대해.

칼리리 2018. 4. 30. 01:13





 


 1. 현실적 상황에 대해.




 "갑자기 든 생각인데."

 

 문득 신리가 그렇게 얘기했다. 장소는 언제나의 카페. 시간도 여느 때의 그 시간이다.

 

 "보통 주인공과 히로인이 한 명씩 등장해서 이렇다 할 것 없는 잡담을 나누는 소설에서 말이야."

 "등장인물을 극한까지 줄여서 순전히 작가가 편하게 쓸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그런 소설 말이지."

 "그래, 그런 소설."

 

 격하게 공감하듯 신리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 류의 소설들은 어쨌든 히로인이 미소녀로 설정되는 경우가 많잖아."

 "그래야 팔리니까."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예쁘면 예쁘게 설정할 수록 좋다. 추가로 단순히 예쁘다, 아름답다, 미소녀다, 라고 구구절절 말해도 확 와닿지도 않기 때문에 무언가의 명함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를테면 학원의 아이돌이라든가, 명문가의 아가씨라든가, 잡지의 모델이라든가, 진짜 아이돌로 활동하는 연예인이라든가, 등등. 대부분의 경우 저 안에서 벗어나질 못한다.

 

 "그리고 주인공은 비교적 평범하고."

 "그래야 감정이입을 하기 쉬우니까."

 

 그래서 자기소개 겸 소설 서두에 '나는 지극히 평범한 고등학생이다.'따위로 말하곤 하지만, 지금에 이르러서 이런 거짓부렁을 믿는 독자는 아무도 없다. 많은 경험을 통해 독자들은 이렇게 지껄이는 주인공이 사실은 힘을 숨기고 있다든가, 잠재력이 뛰어나다든가, 묘사가 제대로 안됐을 뿐이지 얼굴이 잘생겼다거나 하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런 둘을 엮어야 하니까, 무언가 작위적인 상황 설정을 만들 수밖에 없단 말이지."

 "그렇지."

 "이를테면, 히로인의 비밀을 주인공만이 우연히 알게 됐다거나, 같은 동아리 활동을 강제로 하게 된다거나 하는 알기 쉬운 상황 설정들이 있지."

 

 일단은 '평범한 고등학생'인 주인공이 학원의 아이돌 운운하는 미소녀 히로인과 접점을 가지려면 저런 식으로 세계의 의지가 작용하는 일이 일어나야 한다. 평범하게 말을 걸어서, 점점 친해지고, 그러다가 사귀는 걸로 골- 하기에는 작품의 주인공도, 그걸 읽는 독자들에게도 너무 허들이 높다. 그리고 그렇게 전개를 해버리면, 주인공과 히로인 사이의 운명적인 연결을 느끼게 하는 부분이 전혀 없다. 언제 어느 때라도 로맨티스트인 독자 제군들을 위해서는, 평소에는 일어나지 않을만한 대단한 사건! 엄청난 비밀! 뭐, 이런 상황이 필요하다. 

 

 "자, 그럼 여기서 주제에 들어갑니다만."

 "응."

 "일단 저, 신리는 일단 외모출중, 학업우수로 학교 내에서 그 나름대로 유명한 인물입니다."

 

 응?


 "갑자기 자기자랑이 시작됐는데 반응을 어떻게 해야하는 거지?"

 "일단 들어봐. 크흠, 학교는 대학교입니다만, 소설적으로 따지면 학교의 아이돌……까지는 안되어도, 그에 준하는 위치정도는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주로 외모적인 면에서 말이죠." 

 "하아."
 "그런 저와 수업이 끝난 오후 다섯시 정도의 시간에 언제나 같은 장소에서 만나 두서없는 이야기를 나누면서 매일 같이 시간을 보내는 누군가는 어떤가요. 아까 말한 사실을 염두해서 대답하시길."

 "지극히 평범한 대학생입니다."

 "네, 나왔습니다. '지극히 평범한 학생'. 너는 라이트노벨 주인공이냐!"

 

 신리가 손날을 만들어서 내 머리를 치려고 한다. 물론 닿지 않는다. 신장적으로 생각해도 무리지.

 

 "뭘 말하고 싶은 거야."

 "아니, 이 만한 미소녀인 나와 평범한 네가 이런 식으로 시간을 보내기 위한 당위적인 설정이 부족하다는 거야. 뭐야 대체, 이 모임은. 제 3자가 봐서 납득할만 한 설정이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사실 묘사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뿐이지, 내가 엄청난 미남이라거나."

 "그건 아니지."
 

 조금의 사이도 두지 않는 빠른 대답, 감사합니다.


 "사실 우리 집에 돈이 엄청 많아서, 그걸 노리고 네가 접근했다거나."

 "그건 실제로 어떤지 모르겠지만, 평소 네 생활을 보면 돈이 많은 건 아니지. 그리고 난 그렇게 악녀가 아니야."

 "사실 나는 뒷세계에서 이능력을 활용해 요인 암살로 매일을 보내는 프로 살인청부업자고, 너는 그런 나를 감시하기 위해 초법규적 조직인 '기관'에서 파견된 에이전트. 언제나 '기관'의 의뢰는 완벽하게 해낸 내가 감시원까지 대동하면서 처리해야할 일은, 그 세계적으로 악명높은 매드 사이언티스트 속칭 '크리에이터'로 불리는 남자의 암살의뢰. 하지만 그 남자에 대한 무수한 암살의뢰는 지금껏 성공한 예가 없었다……. 성공률 0%의 암살의뢰, 그들은 과연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 차회, '녹차파르페는 더치페이로.'"

 "……어디부터 태클을 걸면 되는 거야?"

 "녹차파르페쪽부터 부탁합니다."

 "먹고 싶은 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신리는 한숨을 쉬면서 카운터로 가서 주문을 얘기하고 왔다. 아무래도 좋은 이야기지만, 이 카페의 주인은 신리와 친분이 있기 때문에 이런저런 편의를 봐주고 있다. 우리도 되도록이면 이 가게를 이용하려고 하고 있고.

 신리가 파르페를 들고 돌아왔다. 본인도 먹고 싶었는지 두 개다.

 너무 달지 않은 쌉싸르한 맛을 음미하는 데, 신리가 재차 얘기를 꺼냈다.


 "네가 그런 게 아니라는 건 내가 잘 알고 있어."

 "근데 무슨 설정이야. 평범하게 얘기하다가 취미나 성격이 잘 맞아서, 같이 있으면 재밌으니까 적당히 보내고 있는 거잖아."

 "그래! 그거야 그거!"

 

 갑자기 목소리를 올린 신리는 어이없다는듯 인상을 찌푸렸다.


 "두 사람의 인연을 묶을 운명적인 무언가가 없으면 독자가 보기에 불안함을 느낀다고. 이를테면, 취미와 성격이 잘 맞으면서 너보다 상위의 스펙을 가진 남자가 있다면 그쪽으로 갈아탈 수도 있을 거라는 위기감이라든가. 무슨 느낌인지 알겠어!?"

 "우와, '스펙'으로 남자를 바꾸는 여자가 여기있습니다, 여러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예를 들어 하는 소리야, 예를 들어!"

 

 답답하다는듯 책상을 땅땅 치는 신리였다. 뭐가 불만인 거야 대체.

 

 "그래서 어떻게 하라는 거야?"

 "두 사람이 만나기 시작하는 데 운명적인 무언가를 느끼지 못했다면, 그걸 덮을만한 사실을 만들어버리면 되잖아."

 

 그런가.


 "오늘 우리 집 비어있어. 자고갈래?"

 "그게 아니야, 멍청아!"


 이번엔 머리에 맞았다. 이거라고 생각했는데.


 "너, 그거 성희롱이야. 알고있어?"

 "죄송합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요는, 관계를 진전시키면 된다는 거지. 운명적인 인연이나 이런 건 결국, 주인공과 히로인이 사귄다는 골을 위한 방편에 불과하잖아? 그 골에 다다르면 된다는 이야기야. 그럼 독자도 안심, 작가도 안심, 주인공과 히로인도 안심."

 "너무 노골적인데."

 

 그런 부끄러운 소리를 하면서 신리는 전혀 표정에 변화가 없다. 조금 얼굴을 붉힌다거나, 새침한 표정을 짓거나, 아니면 아예 '흐, 흥, 네가 꼭 원한다면 너랑 사귀어 줄수도 있어! 차, 착각하지 마! 벼, 별로 좋아하는 건 아니니까?'로 말한다거나. 그런 걸 원했다.

 여전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기대하듯이 나를 곧게 바라보는 신리와 잠시 눈을 마주치다가, 나는 일어섰다.


 "자, 집에 가야지. 내일은 내일의 수업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으니까."

 "?"

 "뭘 '이 남자는 여기까지 했는데 그 한 마디를 못하는 거야? 이 멍청이, 찌질이!'라고 말하려는 표정을 짓는 거야? 첫 화부터 주인공과 히로인이 사귀어버리면 후속 캐릭터가 나올 여지가 줄어들잖아. 미래를 생각하자고."

 "……."


 신리가 굉장히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서로 좋아하고 같은 시간을 보내면 됐지, 굳이 사귀니 어쩌니 하는 형이하학적인 이야기를 꺼낼 필요가 있을까 싶어서."

 "……."

 

 눈초리가 더욱 매서워졌다. 슬슬 빠질 타이밍인가.


 "네가 원하는 말은 적절한 타이밍을 봐서 제대로 말할테니, 오늘은 봐줘. 안녕. 사랑해."

 "아, 잠깐……."


 뒤에서 만류하는 신리를 두고 나는 슥 빠져나왔다. 저런 대사에도 역시 신리는 전혀 변함없는 표정이었다. 그래야 내가 반한 여자지.